여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동급생이 있었다. 소문을 들은 친구들 입에서는 "어머머, 몇 살인데 결혼을 해?" 혹은 "공부 꼴찌 도맡아 하던 걔?"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문을 들은 나도 거뭇거뭇한 얼굴에 주근깨투성이의 땅딸막한 그 아이를 떠올리며 "어머머"를 연발하며 깔깔댔다.
그런데 몇 해 전 한국 갔을 때 친정엄마를 통해 까맣게 잊었던 그 아이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사업가로 성공해 유명 프랜차이즈 햄버거 매장을 몇 개나 소유한 유명인사가 됐고 그녀의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끝에 날리신 "그 꼴찌가"라던 엄마 말에 킥킥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마음 저 안쪽에서 알 수 없는 쾌감이 밀려 왔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뛰어난 인물 대부분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의 산증인인 것 같다. 잘 된 사람을 미화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떡잎이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에게는 사실 좀 기운 빠지게 하는 말이다.
남다른 불우한 환경을 껴안고 태어나는 생명은 어떨까. 지난 달 5일 저녁, 동부에 있는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정말 마음에 와 닿는 영화니까 꼭 보라는 말과 함께, 사흘간 미 전역 700여 개 극장에서 동시 상영되는 영화 '드롭 박스(Drop Box)'의 상영 마지막 날이라며 집 근처 영화관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부랴부랴 영화관을 찾아 들어갔다.
이미 영화는 시작되었고 캄캄한 실내가 눈에 익을 때를 기다려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맨 앞자리를 시도해 보았지만 눈이 어지러워 포기하고 영화관에 빈 좌석이 거의 없어 뒤쪽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핸드백을 허리에 받힌 불편한 자세로 영화를 봤다. 한국인 관객이 거의 없는 미국 영화관에서 한국사람이 출연하고 한국말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기분이 좀 묘했다.
25살 미국인 청년이 제작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드롭 박스'는 아기가 길가에 버려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아기 상자'를 일컫는 말이다. 말만 들어도 비극의 전조를 느끼게 하는 '아기 상자.' 10대 미혼모와 장애아의 부모가 버린 유기 영아의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의 생을 건 한국의 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담담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절대 담담할 수 없는 주제와 가슴 적시는 아픈 사연이 관객의 숨길을 사로잡는다.
버려진 아이 문제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글로벌한 이슈임을 강조하지만 사우스 코리아 서울에서는 한해에 백 명 이상의 신생아가 버려진다는 배경 설명을 들으며 부끄러움으로 온몸이 움츠러졌다. 그런 나와는 달리 영화가 전하는 생명 메시지에 뜨겁게 반응하는 영어권 관객들에게서는 경건함과 경외심이 느껴졌다.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아기 상자를 통해 소중한 생명을 지켰으며 이 아이들도 하나님이 쓰시고자 이 땅에 보내졌음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 는 '아기 상자'를 만든 이종락 목사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꼴찌는커녕 이 땅에 존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못할 뻔했던 작은 생명들 위로 밝은 햇살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 2015.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