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미국 그것도 LA에서만 40년 이상을 살아오셨다는 분이 더러 계신다. 그 말을 들으면 '인생의 황금기를 미국에서 보내셨구나!' 뭉클한 감동과 함께 40년이라는 긴 세월의 강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미국에 오신 분들은 여러모로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 같다. 미국 오게 된 사연이야 어떻든 녹록지 않은 삶의 여정을 지나왔으리라 짐작해 본다. 각자의 삶을 꾸려가느라 주위 돌아볼 새 없이 살다가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행사장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얼마 전 한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문단 Y선배님의 들뜬 음성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쪽에 있는 한 젊은 남자분에게 다가가 "혹시 박 아무개 선생님의 아드님 아니세요?" 조심스레 묻는다. 맞습니다, 라는 답을 듣자마자 "어머머 어쩜 돌아가신 아버님이랑 똑같아요?" 어릴 때 본 후 처음인데도 얼굴 모습뿐 아니라 걸음걸이까지 똑같아 금방 알아보겠다며 연거푸 감탄이시다.
그 젊은이의 모습 위에 자잘한 주름살과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그 남자 아버지를 내 나름대로 그려본다. 이민 생활을 시작한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저 아들보다 더 펄펄 끓는 나이였으리라. 하지만 그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중년이 된 그의 아들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선배님 모습에 괜히 코가 시큰하다.
친구 중에 누가 하늘나라로 떠났고 누구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고 누구는 어떻고 내가 전혀 모르는 분들의 떠남에 대해서 혼잣말하듯 말씀하시는 Y선배님, 그 나이에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일상의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선배님의 자식 세대쯤 되는 중년은 어떨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기 자식을 어떻게 잘 키워 갈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직장을 구할지 혹은 사업을 탄탄하게 세워나갈지 무궁무진 남아 있을 것 같은 앞날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노년에도 중년에도 속하지 않는 어중간한 세대는 또 어떨까? 오래전 어느 분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라고 50대 중반인 자신을 표현했을 때 젊지 않으면 늙은 거지, 속으로 구시렁거렸던 적이 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가는 건 줄 알았었다면 절대 말꼬리 잡는 그런 마음 품지 않았을 것이다. 백세 시대 운운하며 50대, 심하게는 60대를 중년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일찌감치 직장에서 퇴직당한 한국 사는 지인들 소식을 듣다 보면 50대를 중년이라고 하기가 좀 망설여진다. 몸은 중년인데 사회적인 위치는 노년이 된 현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청년, 중년, 노년 어디에 속해 있든 우린 누구나 내 인생 중 가장 늙은 나이에 서 있다. 동시에 가장 예쁜 나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 있는 한 나이테는 늘어날 것이기에, 오늘은 언제나 예쁜 나이로 남을 것이기에, 편안하게 카메라를 응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카메라에 찍히는 나도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누군가에게 찍히는 나도 있다.
Y선배님의 마음에 찍혀 있던 오래 전의 인연이 그 아들을 통해 현상이 된 것처럼, 우린 마음의 카메라에 서로를 담으며 살아간다. 중년, 노년을 지나 한 세대가 바뀌는 세월도 잠깐이겠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5.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