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예배 가는 이른 시간, 철로를 끼고 있는 동네 큰길 가에 유럽계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서로를 보듬으며 서 있었다. 저건 또 무슨 상황이지? 이 새벽에? 갸웃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며칠 연달아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자세의 그들이 내 눈길을 붙잡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새벽에는 우산 속 꼭 껴안은 채였는데 그 모습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름다워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길을 두었다.
눈 뜨는 순간부터 감을 때까지 아니 꿈속까지 한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는 것, 그들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 같다. 무지갯빛 미래를 기대하며 결혼행진곡에 발맞춰 들어갔는지 혹은 갈 예정인지 모르지만, 서로를 향해 연연하는 첫마음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그 속에서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 쓰면 한 줄 밖에 안되는 결혼생활인데 과정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것, 요즘 부쩍 실감한다.
흔히 '인생에서 피해야 할 3가지'로 초년 성공, 중년 상처, 노년 빈곤을 든다. 그중 중년 상처는 배우자의 죽음과 이혼이라고 하는데 죽음이야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화합을 이루지 못해 깨지는 가정을 보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최근 몇 년 사이 가까운 지인 중에 이혼한 가정이 몇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정했던 순간들을 삭제 버튼 하나로 끝낸 것 같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얼마 전 또래 이웃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분이 "결혼 생활, 그거 쉽지 않지"라며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알고 있는 말인데도 그날따라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아들 내외가 헤어져 손자 둘을 맡아 키웠다는 이웃 팔순 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들 좋아서 결혼했고 자식 낳았으면 어쨌든 책임져야지, 노기 띤 음성에 아들을 향한 원망이 가득 배어났다. 하지만 곧이어 손자 자랑이 늘어지셨다. 돈 한 푼 안 받고 끝까지 다 들어드렸다.
오래 전 이휘향이라는 탤런트가 출연한 드라마가 있었다. 극 중 이휘향이 결혼을 앞둔 조카에게 들려주는 대사 중에 '결혼생활, 마음에 맞으면 얼마나 좋은데'라는 말이 있었다. 평범한 그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고 대사에 딱 맞는 그녀의 진지하면서도 화사한 표정은 또 얼마나 실감이 나던지. 사실 그 대사는 드라마 작가의 결혼에 대한 일가견임을 알지만, 아무튼 그 후 나는 이휘향의 팬이 되었다.
'우산 속의 연인'이라는 내가 만든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그들의 사랑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낭만은 줄어들고 서로에게 느끼는 매력이 반감된다 할지라도, 이 지구 상에 당신이 있어 정말 좋다는 고백과 함께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를. 세월이 더 지나 황혼빛 뉘엿뉘엿 질 쯤이면 두 손 꼭 잡고, 철길 따라 흐르는 큰길 가에서의 뜨거웠던 새벽을 회상하며 천천히 공원을 거니는 먼 훗날의 그들의 일상을 상상해 본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