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대화(對話)/ 정용진 시인
2016.10.21 21:53
인간과 대화(對話)
정용진 시인
대화는 언어를 통한 너와 나의 아름다운 교감이요, 만남이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마음을 읽고 상대방의 생각을 발견하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역사 속에서 보면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는‘아고라(Agora.廣場)’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고한다.
그는 자신을 희랍의 쇠파리인 등에(Gadfly)라고 칭하고 잠든 청년들의 등가죽에 따끔하게 침을 놓아 잠에서 깨워 놓겠다고 역설했다.
자신은 늘 신과 진리와 양심의 소리(Diamonion)를 들었다고 말하고, 청년들이어 무지의지(無知의知)를 깨우치라고 외쳤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 속에는 깊은 마력이 숨겨져 있어 사랑하는 연인과의 언어는 고요한 리듬을 타고 오는 밀어(密語)요, 정담(情談)이 된다. 반면에 학문을 논하는 탁상에서는 힘찬 토론(討論)이 되고 너와 나와의 만남 속에서는 소중한 대화(對話)가 된다.
대화 가운데서도 자신의 감정을 사유(思惟)의 체로 걸러내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 쏟다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쉬운 직설(直說). 직언(直言)이 되기 쉽고,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적당한 의사를 표출하다 보면 언중유골(言中有骨)의 오해를 받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명언을 남겼을 것이다.
대개 상대방과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는 대화(Dialog)라고 하는데 혼자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답하는 독백(Monolog)에 대치되는 언어다. 언어에는 사실을 보고 그대로 쏟아내는 직설이 있는 반면에 사실과 다르게 여기저기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 있다. 이에 엇나가 퍼붓는 독설(毒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외쳐대는 역설(逆說)이 있고, 또 숨겨야할 사실을 남 몰래 퍼뜨리고 다니는 유언비어(流言蜚語)나 비방(誹謗)혹은, 토설(吐說)이 있기도 하다.
선비들이 모여 세상일을 논하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있는 반면에 서민들이 모여 화투를 치면서 나누는 음담패설(淫談悖說)이 있기도 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고부(姑婦)간에는 그 사이가 항상 불편하고 갈등이 있으며, 정치를 하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는 서로 자기들의 의견과 정략만이 국민을 위한 중요한 정책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공익은 멀어져가고 늘 정쟁만 일삼아 국민들의 원망을 사게 된다.
남을 돕기 위하여 건네주는 조언(助言)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여 힘을 실어주는 첨언(添言)이 있고, 사실과 다른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며 남의 명예를 실추 또는 회손 시키는 낭설(浪說)이나 험담(險談)이 있다.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는 침소봉대(針小棒大)와 장광설(長廣舌)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마음껏 떠들어대는 실언(失言)과 망언(妄言)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 마음이 바른 사람(正心)에게서 바른 말이(正言) 나온다. 그래야 그 말에 신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른다.
장자(莊子)는 청무성(聽無聲)을 강조했다. 청무성이란 인간들이 쉽게 들을 수 없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한다는 말씀으로 신의 소리, 도인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상에는 적당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저두굴신(低頭屈身)과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빈 수레 소리로 가득 차있다. 바로 듣고 옳게 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명심보감에 보면 ‘아버지는 자식의 덕을 말하지 아니하고, 자식은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아니한다.(父不言子之德 子不談不之過)’는 말이 있다. 인간사에서 소중한 것이 덕담(德談)이란 뜻이다.
대화는 인간 만남의 기쁨을 여는 시금석이요, 아름다운 삶의 윤활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남과 대화가 단절되면 고뇌와 고독이 존재할 뿐이다.
지상에서 한번 주어진 삶을 풍성하게 누리기 위하여 너와 나 사이에는 꿈임 없는 성실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때에만이 진정한 자유인의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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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6.10.22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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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6.10.23 06:09
인터넷에 떠 도는 것을 잡아 왔읍니다
아이가 몇 살인지는 몰라도...
이 일기를 읽은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검자 도장을 찍었을까?이 아이의 후편 일기는 이렇지 않을까?
결석을 한 뒤로 더 혼이 났다
이제는 영원히 혼나지 않은 방법을 택했다
학교를 그만 다녀야겠다..새나라의 어른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게 요즘 5060 세대의 속마움입니다
"https://www.youtube.com/embed/evkH2HPjjtM"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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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6.10.23 11:25
Ode to joy
외로운 황혼 (김춘수)
닿을 수 없는 거리는 그리움을 낳고
메울 수 없는 거리는 외로움을 낳는다
바라는 보아도 품을 수 없는 것들은
사무침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면
그 거리만큼 눈물이 흐른다
이별의 강은 그래서 마르지 않는다
한 생生의 황혼에 서면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가까울 수록
이별의 슬픔은 배가倍加된다"https://www.youtube.com/embed/35MhG29N6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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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2016.10.26 07:16
고국에서 보낸 소식..
이발소, 종편, 박근혜
▲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국민에게 사과했다. ⓒ경향신문 DB
가까운 미용실을 이용하다가 아니다 싶어서 인근의 이발소를 다니게 되었을 때다. 60대 후반의 이발사는 과묵한데다 이발 솜씨도 좋아서 한 1년쯤 거기서 머리를 깎았다. 어느 날부터 이발소에 주인의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텔레비전은 늘 종편에 고정되어 있었다.[관련 기사 : '이발소'로의 귀환]
종편과 이발소
머리를 깎는 30여 분에 불과하지만 앵커인지 선동꾼인지 모를 자칭 언론인들이 진행하는 억지와 왜곡, 고성과 비약으로 일관하는 뉴스를 듣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어느 날 나는 그 가게에 발을 끊었다. 50대 초반의 얌전한 이발사가 드라마나 보는 학교 앞 이발소로 옮긴 것이다.
가끔씩 종편이 박근혜 정권을 떠받치는 아주 실한 기둥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포털에서조차 눈길을 끌어 들여다본 뉴스가 종편발이면 되돌아가기를 누르는 사람이니 종편의 폐해를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편의 폐해나 해악이야 굳이 겪지 않아도 아는 일 아닌가 말이다.▲ 시골 이발소는 종편이 종일 켜져 있는 곳이다.
도시지역과 달리 시골에 가면 가게마다 틀어놓은 텔레비전 채널은 종편 일색이다. 시골에 사는 이들에겐 일상이니 면역이 될 만도 한데 그걸 못 참는 친구가 있다. 그놈 종편 때문에 일부러 이웃 동네의 이발소에 갔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메시지로 보내왔다.
경제는 바닥으로 내려앉고 민생은 파탄지경이다. 안보는 불안하고 사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찢어졌다. 정부 기능은 마비되고 장관들은 무기력하고 관료들은 나서지 않는다. 나라에 온전한 곳, 정상적인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
- 이대근 칼럼 중에서
지난 4년간의 실정에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지지율이 25%로 곤두박질쳤지만 이 영남 성골의 고장에서의 공기는 좀 다르다. 주로 60대 이상의 고령층이긴 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박근혜 엄호부대다. 이들은 드러난 권력의 실정과 무관하게 ‘묻지 마’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무지도 더러는 죄악이다
그 이유는 뻔하다. 최순실 게이트에 떠밀려 국민에게 마지못해 사과하는 박근혜를 향해 찬탄을 금하지 못하는 이 촌로의 반응처럼 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지 근거가 분명하지 않지만 그걸 거둘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묻지 마 지지에 힘입어 권력의 일탈과 독주가 이어진다. 무지에 기반한 정치적 지지도 죄악일 수 있다.<201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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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LOOK ( 최재선 교수)
거침없이 이어진 초록 위로 햇살이 망설이지 않고 떨어지자 불어오는 바람에 초록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초록이 떼로 머문 곳은 어느 곳이든 숲을 이뤄 눈앞이 맑고 시원스럽다. 숲은 나무가 자기 곁에 다른 나무를 두고 있기 때문에 태생부터 공존의 원리를 타고 태어났다. 곁은 어떤 기준이 되는 대상으로부터 공간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쪽을 일컫는다. 측근이란 말도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곁이란 말 속에는 다분하게 공존이 배어있다.
절대고독을 꾀하며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
곁에 아무도 없으면 사는 것이 숨막히게 고독하고 외로울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서로 교제하면서 지내지만 곁에 늘 함께 있어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어렵고 힘든 일을 겪을 때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고 고통을 함께 나눠 줄 사람이 드물다.
아무리 예쁜 꽃도 섬처럼 홀로 피어있으면 아름다움이 덜하다. 곁에 다른 꽃이 함께 무리를 짓고 피어야 미적으로 극치를 이룬다.
공간적으로 같은 곳에 있을지라도 정서적으로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곁이라 할 수 없다.
어떤 대상과 지근거리에 있지만 서로 소통하지 않으면 그 거리는 아득하게 먼 거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 대화가 없는 이른바 “대화의 실종시대”에 살고 있다. 가족이 함께 있어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마트 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 곁은 마치 갈밭을 스치는 바람만 머물 뿐, 공허하고 허허하다. 따라서 소통은 곁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곁이란 말에는 함께 가는 동행이 물들어 있다. 우리 사회는 “곁 문화”를 잃은 지 오래이다.
이타보다 이기가 공동체보다 개인적가치를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사회가 각박해지고 황무지처럼 쓸쓸하다.
날마다 끔찍하고 소름 돋는 비인간적이고 반윤리적인 범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 목숨이 길바닥에 뒹구는 돌멩이 정도로 취급받고 있는 시대이다. 게다가 제동장치를 잃은 자동차처럼 초고령화사회로 질주하고 있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곁에 사람이 없어 고독감 수치가 더 높아진다.
이제 젊은 세대는 효나 공경이라는 깃발을 걸고 부모나 웃어른을 더 이상 살갑게 대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늙은 부모가 귀찮다는 이유로 봉양은 커녕 버리기까지 하고 있다.
청년은 취업이 되지 않아 곁에 누군가를 둘 여유가 없다. 설령 결혼을 했다하더라도 곁에 있는 사람과 오붓하고 따시게 보낼 시간이 없다. 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곁에 눈 돌릴 사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공하는 기준을 돈으로 삼으면서 우리 곁은 한겨울이다. 돈이 힘이 되고 권력이 되었다. 돈이 있는 사람 곁에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곁에는 냉대와 질시가 있을 뿐이다.
<곡성>이란 영화에서 한 마을에 잇달아 자살과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해도 효험이 없자 주민이 마을에 있는 교회를 찾아 자문을 구한다.
이 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종교가 사회문제에 대해 방관하면 나약하고 미련한 우리 인간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다. 사람 곁에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사람 곁에 사람 냄새가 나야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갈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embed/0PqirnCVKP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