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6)
소통에 대하여
홍인숙 (Grace)
밤이 깊었다. 한낮 분주했던 거리에는 정적이 감돌고 가로등만이 큰 눈을 껌벅이며 홀로 밤을 지키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Nabucco) 중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듣는다. '나부코'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 2세를 칭한다. 유대 실향민들이 옛 예루살렘을 그리며 부르는 합창곡이다. 나 역시 오랜 세월 고국으로 향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어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잔잔한 서글픔이 가슴 가득 밀려온다.
잠이 오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중요한 검사로 병원에 가야 할 일의 긴장감에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다. 이제는 병원이 익숙해질 나이이기도 한데 아직도 병원에 가는 일은 초조하고 시간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
사람들은 실제로 일어날 일의 염려보다 미래의,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미리 염려하는 쪽이 훨씬 많다는 통계가 있다. 나 또한 걱정을 미리 앞당겨 하는 성격이라 더욱 병원에 가는 일에 여유롭지 못하다.
이십 대에 미국에 와서 제일 처음 장만한 것은 살림도구나 TV가 아닌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번듯한 가구나, 값나가는 주방기구 하나 없으면서도 내게는 과분한, 성능 좋은 음향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은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거실 한쪽에 쌓이는 레코드 판, CD들 속에서 정신적 풍요로움을 느끼던 시절이 지금도 행복했던 날의 추억으로 떠오른다.
나는 나이 터울이 많은 오빠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며 음악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그 곁에서 사춘기를 보내면서 내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부터 팝송, 그리고 클래식 음악에도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새로운 출발의 두려움과 설렘보다는 즐겨 듣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상실감이 무척이나 컸다.
젊었을 땐 열심히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는 틈틈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다. 몸은 분주하고 고되었어도 그 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어떤 땐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생활이 힘에 겨워 빨리 세월이 흘러 리타이어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 때마다 더 많은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생각만 해도 마구 설레어지곤 했다.
그러나 막상 나이 들어보니 노년의 생활은 젊었을 때 꿈꾸던 여유로운 일상만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 갈 일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몸 구석구석 문제가 생기며 각종 검사할 일도 자주 일어난다.
매번 보내준 검사 결과도 꼼꼼히 읽어야 한다. 병원 빌과 닥터 청구서, 처방 약품 설명, 보험 관계 서류, 주 정부에서 보내오는 각종 공문서 등..웬 우편물이 그리 많은지 젊었을 때보다 더 전문 영어가 필요해진다. 늙는 것도 서글픈데 그 늙음을 준비하는 일 또한 얼마나 복잡한지 젊었을 때 꿈꾸던,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젊었을 때보다 시간적 여유는 생겼을지 모르지만 늙음과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에 대비하는 긴장감에서 젊었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담고 있는 느낌이다.
아침이 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들어섰다. 이른 시각인데도 환자들이 북적거렸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듯한 젊은 흑인 여인 앞에 서게 되었다. 왠지 좀 불안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미국 생활을 하면서 아직 인종차별을 당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솔직히 간혹 흑인들을 만나면 살짝 긴장되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영원한 숙제, 흑·백 인종 갈등으로 인해 흑인 폭동이 자주 일어난다. 미국 경찰의 공권력은 막강해서 범죄 용의자 체포 과정에서 종종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지금 이 시각에도 뉴스에는 20대 흑인 청년을 체포 중 총격 사살한 백인 경관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무죄판결로 분노한 흑인들의 폭동을 보도하고 있다.
범죄 여부와는 관계없이, 인종 차별에 의한 과잉진압이라고 분노한 흑인들의 약탈과 방화, 경찰관들에게 보복 폭행으로 치안이 마비된 상태이다. 이번에도 역시 흑인 지역에서 사업하는 많은 한인 업주들이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
일부 백인 우월자들 사이에서 차별받는 흑인들은 상처가 깊다. 그런 흑인들은 자기들의 열등감 분출을 소수민족인 동양인에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동양인에 대한 시선은 부드럽지 않고, 우리 한인 동포들 역시 타민족들과는 잘 어울리면서 유독 흑인들과의 교류는 드물다.
나의 예감대로 그녀는 나이든 동양의 여인을 무시하는 듯한 표정과 슬쩍슬쩍 피어오르는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나와 시선을 맞추지도 않고 마지못해 직업상 무뚝뚝한 대화로만 일관하였다. 나 또한 흑인 특유의 빠르고, 악센트가 강한 그녀의 영어 발음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녀와 나, 우리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인종적 선입견과 편견이 고조되어 불편한 기운이 감돌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감미로운 노래가 병원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내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였다. 닐 다이아몬드가 누구던가. 내 젊은 날의 시간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그를 빼놓을 순 없다. 얼마 만인가. 이 시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게 더욱 반가웠다. 그녀는 업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닐 다이아몬드의 스윗 캐롤라인이네요.”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와서 멈췄다. “닐 다이아몬드는 내가 참 좋아하는 가수에요. 스윗 캐롤라인은 그의 노래 중 제일 좋아하는 노래이고요.”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그녀는 내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그녀의 눈빛의 의미는 뻔했다. 늙수구레한 동양 여인이 세계 청년 문화를 이끄는 문화 선진국, 미국의 젊디젊은 자기가 따라 부르는 팝송을 알고 있다니. 그녀는 동양 여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말 한 마디가 신기했던지 닐 다이아몬드는 자기도 참 좋아하는 가수라고 말함과 동시에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졌다.
노래 한 곡이 순식간에 우리 둘 사이에 친숙한 기류를 몰고 왔다. 우리는 어느새 스윗 캐롤라인을 함께 불렀고 그녀는 흥에 겨워 몸까지 흔들어댔다. 그녀는 지금까지 사무적이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리, 어디가 불편한가, 무엇을 도와주길 원하는가... 친절하게 묻고 즐거운 기분으로 업무를 담당해주었다. 통상적으로 두세 달이 걸리는 다음 예약도 가장 빠르면서도 내 형편에 맞춰 좋은 날짜로 정해주었고 병원 스텝들이나 알 수 있는 실력 있고 좋은 닥터도 귀띔해 주었다.
소통이라는 것,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같은 생각, 같은 취미의 사람을 만나면 세상은 한순간에 밝아진다. 그런 공유가 따분한 세상을 살맛나게 변화시켜 준다. 그녀와 나. 단순한 음악 한 곡의 소통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오랫동안 같은 음악 세계를 공유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가까워졌다.
음악은 국경과 언어의 차이를 초월한 만국공통어이다. 또한, 음악은 명상이고, 명상은 음악, 즉 음악과 명상은 동일한 현상에 이르는 두 개의 문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음악을 들으면 여러 가지 빛깔과 모양의 파문이 가슴에 일고, 생각은 드넓은 세계를 훨훨 부유하며 자유로워진다. 비록 젊은 날의 열정과 낭만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이런 시간들이 좋아 휴대전화에 주옥같은 음악 300여 곡을 저장해 놓고 언제 어디서나 잠깐잠깐 틈이 나면 좋아하는 곡들을 감상하곤 한다.
중요한 검사를 앞두고 초조한 마음으로 찾았던 병원에서 그녀와 나의 만남은 서로가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를 단순한 만남이었지만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일깨워주었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세계 정세와, 극단의 개인주의로 치닫는 사회, 그럼에도 피부색을 떠나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누구나 존중 받아야하며, 우리의 삶은 아름답다고 믿고 싶다.
한 때 우리가 열중했던 소중한 순간들은 그냥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언젠가 생애의 뜻하지 않은 지점에서 다시 만나지는 경이로움을 나는 앞으로도 또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의 뜨거웠던 젊은 날, 지나온 길들이 훤히 보이며 돌아가고 싶어지는 본향과 같은 그 시절이 오랜 세월을 지나 삭막한 병원 스피커를 통해 행운을 안고 다시 찾아온 오늘처럼.
<수필시대> 통권 71호 11/12-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