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9)
나의 보로메 섬은 어디인가
홍인숙 (Grace Hong)
텍사스 휴스턴에 온 지도 여러 달이 지났다. 분위기가 그동안 살았던 캘리포니아와 달라 많은 부분이 낯설다. 우선 기후가 다르다 보니 계절의 정취가 다르다. 계절 중 가을을 제일 좋아해서 이사 오기 전부터 휴스턴의 가을을 기대했었다. 비록 산은 없지만, 가로수가 많아 가을이면 나무마다 색색의 단풍이 들고, 때가 되면 가지에서 장엄한 이별을 고하고 뚝뚝 떨어져 내린 낙엽들로 거리마다 가을이 가득 찰 것 같았다. 헤세의 시 ‘9월’처럼 여름의 종말 終末을 넘어 비감 悲感한 가을의 물결이 내 안까지 스며들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가을 다 지나고 겨울에 들어서도 꿈쩍 안 하던 나무들은 12월에야 겨우 드문드문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가을도, 겨울도 아닌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였다. 비록 계절의 정취가 없어도 우리 가족이 텍사스에 와서 처음 맞는, 특히 집안의 첫 손주가 태어나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아니던가. 그 아기를 위해 집 안팎으로 성탄 장식을 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사돈 내외분과 함께 성탄절 저녁 식사를 했다. 겨우 뒤집고,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손녀딸은 베이비 산타 옷을 입고 저녁내 재롱을 부려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비로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요즘 나는 인생에서 가장 단순하고 느리게 살고 있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손녀딸과 함께 지내며, 틈틈이 베토벤의 로망스와 야샤 하이페츠, 로스트로포비치,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를 듣는다. 장 그르니에를 읽고, 강은교 시인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늙은 시인이 된 지금에도 읽는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소리 없이 저물고, 소리 없이 찾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동안 캘리포니아에서 누렸던 삶의 재미와 여유로움을 제공했던 많은 부분이 환경이 바뀜으로 자연스레 걸러졌다. 생활이 단순해지니 사람에게서나 삶에서 자유롭다. 오래전부터 실천하려고 마음으로만 벼르던 ‘버리고, 느리게 살기’를 자연스레 실천하게 된 것이다.
결핍이 풍요가 된다는 말이 있듯, 사회생활이 줄어든 틈새에는 정신적 풍요함이 싹트고 있다. 그동안 꿈꾸던 것들이 나를 위한 부분이 많았다면 지금은 가족으로 향한 꿈으로만 바뀌었다. 그럼에도 희생이라는 회의적 생각보다는 나의 작은 도움으로나마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현실적이고 소박한 꿈을 갖게 되었다. 욕심이 사라지니 내 안의 불필요한 갈등도 사라졌다.
최소한의 만남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생각의 결이 밝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성경 묵상과 자아 성찰의 시간도 늘었다. 바쁜 생활과 많은 사람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나 자신이 환하게 드러나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적극적이지 못했고, 너그럽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후회로 맴돈다.
텍사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질문을 한다. 캘리포니아, 그 살기 좋은 곳에서 기후도 안 좋고, 별로 재밋거리도 없는 텍사스로 왜 이사를 왔느냐고 의아해한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 여름이 길고, 무척 덥다. 가는 곳마다 에어컨 시설이 잘되어있지만, 워낙 덥다 보니 실내에 있는 시간이 많다. 텍사스에 한인 동포도 3만 명이나 되고, 한인 교회마다 수백 명씩 출석한다지만,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도 보기 힘들다.
한인 타운도 크지 않고 거리도 멀어 생활의 편리함이나, 사는 재미를 생각하면 문득문득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언제라도 달려가면 반겨주던 드넓은 바다, 눈부신 수평선과 웅장한 파도, 해넘이가 시작되면 온통 노을빛에 잠기는 황홀한 바다, 그 곳곳마다 아름다운 캘리포니아의 바다가 참 그립다.
반면 좋은 것도 있다. 이곳은 비가 자주 내린다. 긴 세월 고국의 향수로 남아있는 소나기, 바로 그런 소나기가 온다. 가끔 천둥, 번개도 동반하고, 빗소리도 우렁차다. 한바탕 요란스레 쏟아지곤 금세 맑은 날씨 뒤로 숨어버리는 게 꼭 한국에서의 소나기 같아 마음을 행복하게 적셔준다.
휴스턴은 미국 텍사스 주의 가장 큰 도시이며, 미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가는 곳마다 높은 빌딩이 숲을 이루고, 툭 터진 고속도로가 대도시다운 위상을 풍긴다. 내가 사는 집 주변에는 최신 의학기술이 집결된 세계 최대 규모의 의료복합단지인 텍사스 메디컬 센터(TMC)가 있어, 세계 각국에서 온 실력 있는 의사들이 대거 모여 있다. 또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존슨 우주 센터가 있으며 석유화학 공업의 중심지로, 수많은 미국 굴지의 석유회사들이 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 옛날 금광을 캐러 미국 전역에서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서부 개척사 시대, 곧 ‘캘리포니아 드림’이 있었다면, 이제는 ‘텍사스 드림’으로 각처에서 많은 사람이 텍사스로 이주한다고 한다. 비록 여름이 길고 습하지만, 일자리가 많고, 다른 주에 비해 아파트 렌트비와 집값, 개스 값이 싸고, 낮은 세금, 주(州) 소득세가 없다는 점이 삶의 질을 높이기 때문인 것 같다.
휴스턴은 주민 90%가 크리스챤이란 말이 있듯이 영성이 깊은 도시이다. 잘 알려진 <긍정의 힘>의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가 시무하는 레이크우드 교회도 휴스턴에 있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눈에 띄고, 일요일에는 문을 닫거나 오후에 문을 여는 상점이 많으며, 일요일 오전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
처음 텍사스에 왔을 때는 사사건건 캘리포니아와 비교를 하였는데 이제는 조금씩 정이 든다. 캘리포니아에 비하면 보수적이고, 불편한 점이 있지만 좋은 점도 많다. 관공서나, 상점 등 어디를 가도 복잡하지 않고 사람들도 친절하다. 그리고 조용하다. 캘리포니아가 재롱부리는 딸이라면 텍사스는 속 깊고 듬직한 아들 같다고 표현하고 싶다. 잔재미는 없어도 소리 없이 해줄 건 다 해주는 듬직한 맏아들 같다.
오래전에 본 영화 ‘자이언트’에 삽입되었던 ‘텍사스의 노란 장미(The Yellow Rose of Texas)’라는 빠르고, 경쾌한 곡이 생각난다. 미국 남북전쟁 중 남군이 애창했던 군가이기도 하다.
텍사스 독립전쟁 당시 호텔 여급이었던 에밀리 D 워싱턴이란 여인이 ‘텍사스의 노란 장미’로, 적군의 사령관이며 멕시코 대통령이었던 안토니오 로페즈를 유혹하여 경계태세를 소홀하도록 만들어 텍사스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배경이 있다.
경쾌한 멜로디 안에 그런 서늘한 음모가 숨겨진 사연보다 나중에 개사 된 가사처럼 한 사나이가 텍사스에 두고 온 여인 (노란 장미)을 그리워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로만 생각하고 싶다. 거기에 조금 더 억지를 부린다면 캘리포니아의 수십 년 지기 친구들이 멀리 텍사스에 외롭게 떨어져 있는 나를 텍사스의 노란 장미처럼 잊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희망도 있다.
캘리포니아의 친구들이 자주 소식을 전해온다. 세상이 좋아져서 스마트폰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소식을 주고받는다. 나의 글이 그곳 신문에 실리면 반가움에 알려주고, 모임이 있는 날이면 단체 사진을 찍어 보내주며 나의 빈자리를 섭섭해한다.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우리들의 시간이 큰 바위처럼 쌓인 그 빛나는 서로의 공간을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카뮈의 스승이며 프랑스 철학자 장 그르니에의 <섬> 중에 <보로메의 섬들>이 있다.
짧으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글이다. 낯선 고장으로 옮겨 간, 장 그르니에가 삶의 변화로 단조로움에 지쳐있던 중 '보로메의 섬으로!'라는 낭만적인 꽃가게의 간판을 보고 매혹되어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알게 된 가게 이름에 대해 실망하고 현실적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멀리 있는 허상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만족하며 꿈을 키우며 사는 곳, 그곳이 바로 보로메의 섬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나의 보로메 섬은 어디인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소중한 시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예쁜 손녀, 문학으로 향한 멈추지 않는 내 안의 울림이 있는 곳, 삶에서 지나쳐버리기 쉬운 소소하지만 빛나는 순간순간들이 모두 나의 보로메 섬들이 될 것이다.
시인 볼테르는 ‘인생은 정원과 같다’고 하였다. 나도 나의 보로메 섬에서 황혼 녘 정원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며 살고 싶다.
<수필시대> 통권 74호 5/6-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