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물결에서
홍인숙(Grace)
언제부터인가 나는, 계곡의 물을 타고 흐르는 나뭇잎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삶을 떠올리곤 한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물 속에는 예쁜 조약돌들이 눈부신 햇살아래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흐르는 물결 위로 빛고운 나뭇잎을 띄워 본다. 나뭇잎은 저항 없이 물결에 실려 흐른다.
그리곤 한 무리 조약돌을 만나면 잠시 멈추어 놀다 어느새 다시 물결을 타고 흐른다. 그러다 또 다른
새로운 조약돌을 만나 다시 멈추어 맴돌다 흘러내린다. 나뭇잎은 그렇게 긴 계곡을 타고 흐르면서 수
없이 바람결에, 물결에 실려 예쁜 조약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어느 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도 나뭇잎처럼 내게 주어진 삶의 물결에 띄워져, 매시절 옮겨가며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연으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철없을 때 만나 고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얼굴마저 희미한 유년의 친구들. 고국에 두고 온 정다웠던
얼굴들. 이민 생활에 활력이 되었던 교우들. 이미 고인이 되신 시부모님과 친정어머니. 내 삶에 많은
교훈을 주셨던 여러 목사님들. 돌이켜 보면 때론 죽음으로, 때론 서로의 헤어짐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주어진 세월 속에 스쳐 가듯 만나고 헤어진 나의 정다웠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내 삶의 강가에 어리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하다.
요즘 들어 세월이라는 굴레는 내게 더욱 만남과 이별을 강요하며 저항할 수 없는 커다란 힘으로 다가
와 나를 당황케 한다.
나이 탓일까. 살수록 더욱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공연히 퇴색된 기억의 편린들을 긁어모아 밤새워 아
파하고,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질금거리며 허무해 한다. 크게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닌데 남의 인생을
살아온 듯 낮설어하며 안타까워하다 보면 어느새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까지 와 있는 나를 발
견하게 된다.
미래는 머뭇거리고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지나가지만 과거는 언제나 정지되어 있다고 한다.
나도 이제 이 과거라는 정지된 최면에서 벗어나고 싶다. 한 잎 물위에 띄워진 나뭇잎처럼 세월의 힘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만남과 헤어짐에 순종할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지리라.
최상의 행복을 소유했던 솔로몬이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며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고 한 말이 정
녕 그만의 탄식은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한 순간씩 집착했던 것들이 많이 있다. 나에게 소유되어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
고, 구속에서 벗어나 한 마리의 새처럼 훨훨 날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큰 욕심 없이 삶에
순종하고, 순간 순간 만나지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자. 우리가 알 수 없는 이별의 순간들을 위해 후
회 없이 사랑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바로 그날 새처럼 가볍게 떠나자.
오늘도 난 내게 남겨진 삶의 물결에서 또 다른 소중한 만남을 위해 예쁜 조약돌을 찾아 흐르고 있다.
한 잎 나뭇잎이 되어.
( 1999년 크리스챤 타임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