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드브로브닉 성벽에서
홍인숙(Grace)
회색의 거리. 끝없이 치솟은 길과 길, 하늘 닿은 성곽 정점에서 신기루처럼 서 있는 야자나무의 첫잎과 만났다. 아직도 전흔이 남아 공간적 이질감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까마득히 발아래 전설의 도시, 벅찬 흔적을 품고 있는 숭고한 거리에는 슬픈 사연들이 바람으로 흩날리고, 나도 작은 점 하나로 차가운 성벽 비바람 끝에 매달렸다.
흑백 필름의 전설처럼, 찬란했던 순간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미로에 서서 과거와 현재를 마주한 방랑객들. 떠나간 삶들은 무수한 발자국과, 성벽을 타고 내리는 빗물이 되어 무심히 흘러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역사는 말없이 흐르고, 나 또한 *드브로브닉 비 오는 거리에서 유구하고 음습한 흔적의 원천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을 뿐.
* 드브로브닉 - 크로아티아 남부 아드리아해 연안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