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득호도(難得糊塗)
2017.09.29 01:18
동양에서는 겸양을 미덕이자 삶의 지혜로 삼아왔다. 해서 다소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성을 보이는 역설적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이와는 다르게 잘나게 보이려고 애쓰는 성향이 짙다.
한데 사실 잘났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어딘가 근심걱정은 더 많아 보인다. 남보다 무언가 한 발 먼저 앞서 가려니 늘 긴장해야 하기 때문일 텐데 그러다 보면 과욕에 얽매기도 십상이다. 반면에 좀 어수룩하게 보이는 사람은 바보 같긴 해도 어딘가 더 편안해 보인다. 무심함에서 오는 결과 때문일까?
어수룩하다거나 바보 같다는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근자에 중국이 늘어놓은 망발 때문이다. 사드 배치 문제를 놓고‘한국인은 김치를 먹어서 멍청해 진 것인가?’ 라며 쏟아낸 저급한 악담 말이다. 방자하기 이를 데 없다.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중국에선 호도(糊塗)라 한다. 중국 청나라 때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서예가, 문학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정섭(鄭燮)이 관리로 근무할 때 사촌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인 즉, 이웃집과 담장 문제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으니 담당관리에게 잘 부탁해 도와 달라’는 거였다.
이에 정섭은‘담장을 몇 자 양보하는 게 어떤가?’라는 답장과 함께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편액(扁額)을 보냈다. 그러면서‘총명하기도 어렵지만 어리석게 보이는 것도 어렵다. 더욱이 총명함을 잃지 않은 채 어리석게 보이기는 더욱 어렵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이 네 글자는 자기를 낮추고 남에게 모자란 듯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현명한 처세가 된다는 중국인의 오래된 격언이 되었다. 잘난 체하고 아는 체를 일삼다가는 다른 이의 미움을 사서 고난을 겪기 십상이었던 험한 시대를 거치면서 얻어낸 지혜일 게다.
더욱이 중국은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가 몰락한 후 오랜 세월 절치부심 속에 살아오면서‘빛을 드러내지 말고 은밀히 힘을 기르라’는‘도광양회(韜光養晦)’ 를 마음 깊이 품고 힘을 길러왔다. 이 말 뒤에는‘난득호도’의 지혜가 있었음이라.
그랬던 중국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치졸함을 보이고 있다. 이웃국가를 윽박지르고 그 국민이 멍청하단다. 정말 그럴까?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멍청한 척하는 것도 초탈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 이는 바보인척 보여도 큰일에서는 멍청이처럼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대사불호도(大事不糊塗)’를 잘 알고 있다는 걸 말이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스스로 바보라 불렀다. “모두 안다고 나대고, 대접받길 바라는 데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북송 때 소동파도‘용맹한 사람은 겁쟁이처럼 보이는 만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중국은 총명하지도 어수룩하지도 그렇다고 멍청한 척도 할 줄 모르는 하수(下手)임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 됐다. 부디 스스로 멍청해 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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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to joy,
전봇대 뒤의 세계/ 이장욱
호기심의 끝에 있는 것.
킁킁거리는 코와
전봇대의 깊이 너머에.
거기서 자꾸 달아나는 중인 것.
냄새가 없는
내일이 없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과 흡사한.
우리는 오래전에 술래잡기를 한 적이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점점 무성해지는 그림자들의 자리에
밤의 전봇대 뒤에
누가 계속 숨어 있다.
개의 목줄을 쥔 채
개에게서 숨으려는 사람처럼.
점점 커지는 머리통을 감추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저녁 무렵에 가만히 내어다본다.
숨어 있는 사람이 아직도 숨어 있는
적막한 골목을.
거대한 머리통이 아직도 자라고 있는
밤의 전봇대 쪽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 시집『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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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모서리와 쓰레기통, 전봇대를 은폐물로 숨바꼭질 놀이를 하긴 해본 것 같은데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별로 없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열 번을 외치는 동안 열심히 뛰어도 도시의 뒷골목에서 숨을 곳은 마땅치 않았다. 술래가 두리번거리면 날도 저물기 전 아이들은 제각각의 집으로 숨어들기 일쑤였다. 숨바꼭질은 활기를 뛰지 못하고 신통찮은 놀이로 끝나고는 했다. 도무지 쓰러질 것 같지 않던 골목 어귀의 나무전봇대가 휘청 넘어간 것은 사라호 태풍 때였다. 이후 새로운 전봇대가 세워졌겠으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날 도시에서 전봇대는 이방인처럼 낯선 존재다. 누구에게도 친숙하지 않은 타자일 뿐이다. 남자가 기습적으로 키스를 감행할 때 여자의 퇴각 마지노선으로 최적화되어 남녀 모두가 감사해마지 않았던 낭만적인 물성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기능상의 고마운 역할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것은 관련된 행위와 현상들 때문이다. 견공이나 주객의 오줌발과 온갖 쓰레기를 다 받아주는 지나친 너그러움만이 아니다. 무단 접착된 숱한 광고스티커들과 그들이 초래한 파장과 끈끈한 흔적들로 인해 우리는 자주 눈살을 찌푸렸다.
전봇대는 근대의 전령으로 다가와서 도시적 삶의 고단한 풍경들과 공명하면서 부정적인 의미들을 증폭시켜 왔다. 세종시의 경우처럼 지중화사업으로 이미 지상의 전봇대가 존재하지 않듯이 언젠가 도시의 전봇대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명박은 대통령당선인 시절 대불산업단지의 대로에 박혀 있던 전봇대를 언급하면서 모든 규제와 탁상행정의 상징으로 삼았다. 선박용 대형 블록의 통행을 방해한 혐의를 받던 이 전봇대는 자신도 모르게 국가실패의 전형으로 내몰리며 새 정부의 선진화 공약을 빛내는 반면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징조작의 과정에서 핵심논점 하나가 사라진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당초 화학제품이나 비금속광물제품 등의 제조공장용으로 설계·시공된 이 공단에 어떤 연유로 선박용 대형블록 제조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그 공장주의 말만 듣고 애꿎은 전봇대만 교통을 방해하는 볼썽사나운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어느 정권에서 시행된 사업이냐를 떠나서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지경의 수많은 의혹과 은폐와 조작과 사바사바가 전봇대 뒤에서 일상화되어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과 흡사’했다.
이명박 정권만 해도 BBK 의혹, 노무현 전 대통령 기획수사, 국정원 불법사찰과 선거개입 의혹, 4대강 개발 비리, 문화·언론계 블랙리스트, 친인척 특혜, 소망교회 게이트, 도곡동 땅 투기 의혹, 외환은행 론스타 매각, 해외자원개발 실패, 저축은행 비리, 곳곳의 민자도로 특혜, 제2롯데월드 신축 특혜, 언론통제와 방송장악, 영포회 불법비리 온상, 내곡동 사저 의혹, 남북관계 파탄 등 백번 양보해서 통치행위로 넘어갈 게 있고 넘기지 못할 게 있다. 본질을 감추고 현상만 표출하며, 구조는 은폐한 채 외양의 사건만 부각시켜서 될 일이 아니다.
국격을 현저히 실추시킨 박근혜 정권의 탄생에는 분명한 이명박 정권의 도움과 기여가 있었다. 그 대가로 이명박 정권의 각종 의혹을 눈감아주는 ‘개의 목줄을 쥔’ 박근혜 정권이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은 거의 객관화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눈감아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2013년 말을 기점으로 박근혜는 야당의 4대강 국정조사 요구에 침묵했고 더 이상 4대강 사업을 정면공격하지 않았다. 그해 총리실 산하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가 꾸려졌으나 면죄부를 주는듯한 몇 쪽의 두루뭉술한 보고서를 내는 것으로 이를 덮었다.
'三人成虎'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세 명이 거리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면 그렇게 믿게 된다는 뜻으로 거짓이라도 여러 사람이 똑같이 하면 호랑이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호랑인지 실체의 호랑이인지는 금세 판명난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비열하고 은밀한 정치공작의 민낯이 드러난 것으로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통’이 드러난 것과 진배없다. ‘밤의 전봇대 뒤에’ ‘누가 계속 숨어 있’는지는 세상이 다 안다. 진실에 근거하여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해야 할지 과거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결정해야할 때다.(해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