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에
홍인숙(Grace)
에밀리 디킨슨은 "Dear March, Come in!" 으로 봄의 노래를 시작하였다.
[정다운 삼월아! 어서 들어오렴. 빨리 달려오려므나, 얼마나 숨이 차겠니? 나와 같이 이층으로
올라가자. 난 네게 할말이 많단다.] 아이같이 천진한 이 시를 읽으면, 정말 삼월이 깡충 뛰어 들어
와 벅찬 숨을 할딱이며 내 가슴에서 쏟아지는 아야기의 봇물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신이 가장 기쁜 마음으로 만들었을 계절, 봄이 다가온다.
봄은, 수많은 나무들이 새잎을 피우기 위해 그 가을 부끄러움 없이 훌훌 옷을 벗고, 두려움 없
이 쏟아지는 겨울눈을 맞아 가며 고난을 극복한, 그 숭고한 투쟁 끝에 맞이하는 최대의 보상이다.
지난해는 참으로 암울한 계절을 보냈다. 피가 멎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
했다. 그 참담함을 난 철저히 혼자서 바뀌는 계절마다 옮겨가며 견디어 내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고, 카프카의 [변신]에서 처럼 한 마리의 곤충이 되어 버둥대
며 왜 내가 살아 있는가에 신음하였다. 그러다 솔로몬의 전도서를 펼쳤다.
생에 가장 어려울 때, 최상의 자리에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의 나에 대한 치유책이었다. 솔로몬은 거듭 탄식하였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겨우내 묵은 이불을 봄볕에 널며, 나의 전부를 절대자의 손에 맡긴다.
하얀 옥양목 사이로 금세 햇살이 쏟아진다.
"당신이시여! 내가 마주하는 사물은 오로지 당신이 이 세상에 내리신 은총입니다. 내가 살갗을
찢기는 추위로 지난겨울을 지내면서도 정직했던 것은, 어느 한날 이렇게 당신 앞에서 맑은 눈물
한방울 흘릴 수 있는 작은 용기라도 남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봄 삼월에게 비로소 나의 아야기를 시작하렵니다."
"자! 삼월아, 어서 이리 오렴. 난 네게 할말이 많단다."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