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미학 / 홍인숙(Grace)
밤새 내린 비가 그치지 않았다.
겨우내 스산했던 수영장 표면으로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빗방울들은 내려왔다.
담장도 젖고, 꽃봉오리도 젖고, 마음도 흠뻑 젖었다.
혼자 있으면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 B 엄마에게 전화를 하였다.
마침, 그녀도 홀로 앉아 창밖에 빗줄기를 보고 있노라 하여 두 중년의 여인은 금세 의기투합하
여 만났다. 그리고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오랫동안 가슴 깊숙이 응어리졌던 이야기들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먼저 맺히는 지난날의 아픔들을...
이제 와서, 꼭 누구를 원망하거나 헐뜯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한
겹 두겹 쌓인 상처들을 부끄러움 없이 나누고, 미쳐 몰랐던 자신의 부족함도 뉘우쳐 보고, 서로
조언도 해 주다보니 문득 이것이 바로 연륜이고 우정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가만히 놔두어도 혼자 서글프고, 다 가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몽땅 도적 맞은 것 같이 허무
한, 사춘기 때보다도 더 감정의 헐떡임이 많은 중년의 길목에 서 보니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필
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밤중, 갑자기 밀어닥친 외로움에 당황할 때 거리낌없이 전화 한 통 나눌 수 있는 속이 깊고
따뜻한 친구가.
살아갈수록 무덤덤한 남편에게서 받는 소외감, 혼신을 다해 키운 자식들이 어느새 자라 무례하
게 뱉어 내는 말투와 행동에서 받는 불쾌감, 써도 써도 쓸곳만 생기는 생활비, 나이가 들수록 여
기 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잔병, 눈앞에 닥쳐오는 노년의 불안감.
이 모든 스트레스를 몽땅 짊어진 중년의 여인들이여 지금이라도 주위를 돌아보고 귀한 나눔의 동
지를 만들자.
남편에게도, 형제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슴속 이야기들을 후련히 나누고,
상처에 새살이 돋을 때까지 감싸주고 기다려 줄 포근한 마음의 동지를.
B 엄마와 헤어져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내 곁에 그녀가 있음을 감사하며 나 또한 다른 사람의 귀
한 나눔의 동지가 되리라 다짐해 본다.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