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면 그리워지는 친구
홍인숙 (Grace)
명혜를 보았다. 그녀는 군중 속에 있었다.
어렵스레 사람의 물결을 헤치고 마주한 그녀는, 그러나 명혜가 아니었다. 명혜를 꼭 닮은 여인
이었다. 그녀도 명혜를 안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명혜로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나의 연락처를 적어 주는데 왠지 매번 끝 숫자만 쓰면 글씨가 번져 엉망이 되었다.
덮쳐 오는 사람의 물결. 번지고, 다시 쓰고, 또 번지는 글씨.
더 이상 종이 마저 찾을 수 없고... 안타까워하다 잠이 깨었다.
명혜. 오늘처럼 봄볕이 사뿐히 내려 않은 날이면 한 다발 개나리꽃으로 다가오는 그녀.
고등학생 시절, 우리는 기독교 학생모임에서 만났다. 그녀는 우리의 학교가 서로 달라 매일 만
날 수 없음을 불행해 하며 늘 편지를 보내 왔다.
또, 자주 집으로 찾아와 동그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아름답고 신나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럴 때면 항상 그녀에게서 졸졸 흐르는 청랑한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16세 생일에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모두 예쁜 시와 그림으로 정성스레 장식하여 건네주던
그녀. 보고 싶다.
언제인가. 그날도 오늘처럼 사월의 햇살이 따가웠던 날이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후암동 어느 큰 집 앞에 서게 되었다. 그 집에는 만발한 개나리꽃이 정원
을 넘쳐 나와 높은 돌담을 가득 덮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별들이 은하수로 내려와 불바다를 이
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고 열심히 늘어진 개나리꽃 가지를 꺾다가 인기척에 나온 남학생
을 보고 줄행랑을 쳤다.
명혜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곳은 같은 모임에 다니던 남학생의 집이었다.
그녀는 햇살이 되었다. 아니, 사월의 햇살 속에 맑은 시냇물로, 한 다발 개나리꽃으로 그렇게
머물고 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때 그 개나리 꽃집의 남학생이 지금 초로의 신사가 되어 내 곁에 있음
을..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