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는 소리
홍인숙(Grace)
아침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새 빛이 어둠을 헤치고 내려오면, 산과 들에 누워 있던 풀잎까지도 일제히 일어나 반기는 소
리,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 소리, 갑자기 시끌법석 쏟아지는 말소리, 샤워장의 물소리, 스토브의
물 끓는 소리.... 아침은 그렇게 밤의 정적을 깨고 신선한 소리로 다가옵니다.
긴 밤을 잎새마다 절망했던 잔디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스며든 길섶에도 그리고 햇
살과 입맞춤을 기다리는 봄 꽃망울에게도, 방울방울 이슬로 내려옵니다.
밤새 내린 비로 촉촉히 젖은 담장에 한줄기 햇살로 모락모락 김을 일구며 찾아온 아침은 행복
입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감미로운 바이올린 곡이라도 듣고 있으면, 더 없이 아름다운 아침의 장을
열 수 있습니다.
큰 저택이 아니어도, 주머니가 가득 차지 않았어도, 가슴 깊이 맺혀 있던 상처가 되살아나도,
어제 떠나간 사람들이 갈망한 이 아침을 오직 살아 있다는 특권 하나만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언
제나 가슴 벅찬 행복입니다.
아침은 설레임입니다. 그 옛날 사랑했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 옛 이름으로 불러 줄 것 같은, 어
디에선가 반가운 편지 한 통이 날아들 것 같은, 사지도 않은 복권이 당첨되어 꿈같은 일 이 벌어
질 것 같은, 이 아침은 잔잔한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아침은 희망입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며 시작은 늘 희망을 동반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암흑이 턴넬을 외로움으로 지나면서도, 오늘 이 아침이 있으므로 비로소
미소 질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이 아침을 얻으므로 또 한날을 잃는다해도 실망하지 않음은 다시
한번 실같은 용기로나마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침의 이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비록 해가 지면 다시금 절망이 스며든다 해도 포기하지 않음은, 언제나 정직하게 다가오는 아
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