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1)
내게 특별한 2016년
홍인숙(Hong)
새해 첫 날
새 달력을 건다
기다림으로 침묵했던 공간이
기지개 켜고 큰 눈을 뜬다
숫자를 안고 있는 여백의 방마다
의미 있는 날을 담으며
올해엔 다정한 사람이고저
마음의 촛불을 하나씩 밝힌다
지난해 나를 지켜온
마지막 한 장 묵은 달력이
풋풋한 새 달력보다 더 무거운 건
지나온 날들의 흔적이 너무 깊기 때문일까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버린 날들이
해 바뀌는 틈새로
헛헛한 바람 되어 돌아온다
혼신을 다해 살아온 날 아니라고
부끄러워 말자
괴로움으로 방황하던 날이라고
슬퍼하지 말자
삶의 무게가 내려앉은
마지막 달력 한 장
마음 섶에 간직하며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온
새해 첫날
새 달력을 건다.
-졸시 <새해 첫날> 전문
미국에서 맞이하는 마흔 한 번째의 해, 2016년. 새해에 거는 희망은 언제나 풋풋한 설렘을 안겨준다. 돌아보면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봄, 여름 화려했던 수목들이 가을 바람결에 일제히 잎을 내리고 앙상한 나목이 되면 어느 틈엔가 새해가 찾아오곤 했다. 살아갈수록 여러 가지 빛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빨라지는 세월의 흐름을 감지하게 된다. 항상 시간의 뒷모습은 그리움으로 아름답다. 고통했던 순간들마저 시간의 물결에 희석되고 오로지 향수만 남는다.
겨울에도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눈이 부시다. 샛노란 열매가 무성한 레몬나무 잎새로 보슬보슬 햇살이 내려앉았다. 창밖 세상을 동경하며 오랜 시간 웅크린 흰 고양이의 눈망울에도 따스한 햇살이 그림처럼 걸려있다. 나또한 침묵하며 새날의 평안을 음미하고 싶다.
우리 친정집 남자들은 모두 생일이 정초에 몰려있다. 아버지와 오빠의 생일이 1월 8일, 남동생이 1월 6일이다. 예전에는 정부에서 이중과세를 금지하여 양력 정월 초하루가 새해 큰 명절이었다. 우리 집은 새해 첫날부터 시작하여 여러 날이 지나도록 어머니께서 음식 장만에 바쁘셨고 친척들로 북적거렸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오빠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의 생일도 1월 8일이다.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며느리로 이어져 삼대가 생일이 똑같다. 이제 부모님은 안계시지만 지금도 여전히 신년이 되면 새해맞이와 더불어 생일 선물 준비로 분주해진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이루고 싶은 일들을 기원하고 새로운 결심을 세우기도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뉴 이어 레졸루션 (New Year's Resolution) 이라고 해서 새해가 되면 각자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목표를 정한다. 나 역시 해마다 몇 가지 목표를 세워 보지만 나이 들수록 꿈도 적고 목표도 소박해진다. 지나간 시간을 안타까워하거나 앞날의 큰 희망보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하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사람 관계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을 뿐이다.
지난해 교회 송구영신 예배시간이었다. 목사님께서 한 해 동안의 자신을 돌아보라고 주신 설문지를 작성하다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나>라는 항목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나이에도 한심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심한 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더 편안해하고 행복해한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곧잘 하지만 보통은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지를 못해 사람 사귀는 게 힘들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상대방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반갑게 손 내밀고 다가가는 것이고, 만나진 인연은 소중히 보살피고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람 관계에 소극적이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주위에 숫기 좋은 사람들을 보면 내가 갖지 못한 그들의 친화력이 무척이나 부럽다.
미국 생활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각 인종 사이에서 한국 사람끼리의 끈끈한 감정은 이민 초기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한국에서는 서로 비슷한 연결고리로 만나 대화나 생각에 공통분모가 있지만 이민 생활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내 관심과는 상관없이 무작위로 만나지는 동포 사회에서 친화력은 필수인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빨리 정착하고 성공하기도 쉽다.
미국은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문화여서 고향이나 학벌, 직업, 심지어 가까운 가족관계 등 소소한 개인적인 사생활을 서로 묻지 않는다. 생소한 고리로 만나, 살아온 환경과 형편이 다르고, 생각의 차이가 나도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문화에 젖어 살다보니 사이좋은 교민사회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또한 타국에서 한국 사람끼리라는 동족의식으로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이 서로 다소 차이 나는 부분을 덮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나같이 숫기 없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에게도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언제부턴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감사하다. 사람이 소중하고, 물질의 풍요보다 감정의 풍요로움에 더 마음이 끌린다. 앞으로도 큰 욕심 없이 가족들과 건강하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날들이 쌓여지기를 바랄뿐이다.
해마다 신년이면 가족, 지인의 생일 등, 각종 기념일을 찾아 달력에 꼼꼼히 표시해 놓는 것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 바쁘게 생활하다 보면 잊고 지나칠 적이 많아 미리 알고 지인들의 생일을 축하해주며,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2016년은 매우 특별하다. 봄이 오면 우리 집안에 아기가 태어난다.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온 집안에 기쁨으로 파도치리라. 새 생명만큼이나 귀한 것이 어디 있으랴.
주위의 친구들이 손자, 손녀를 봐주면 어깨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한마디로 골병든다고 절대 봐주지 말라는 충고를 빈번하게 한다.
아이들이 자기 자식 알아서 잘 키울 테니까 걱정 말고 남은 인생 여행이나 하며 즐겁게 살라고 적극 반대를 한다. 하지만 나는 벌써 아들 부부에게 아기를 낳으면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들, 며느리는 둘이 함께 메디칼 센터에서 레지던트로 바쁘게 근무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도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2세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내 쪽에서 먼저 아기를 낳으면 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더 나이 들기 전에 계획을 세우라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나의 제안에 마음이 놓였던지 며늘아기는 임신을 했고 사월이면 우리 집에도 복덩이가 태어난다. 나도 드디어 축복받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또한, 2016년을 맞이하여 ‘수필시대’ 독자들과 만나는 설렘도 크다. 물론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떠나온 지 무척이나 오래되었고 그동안 고국 방문도 겨우 세 차례 뿐, 그것도 매번 체류 기간이 짧아 모두 합해 한 달도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고국바라기를 하며 오랫동안 살고 있어 모국어 감각도 많이 상실하였고, 한국 문단의 흐름에도 둔감하다.
그 뿐인가. 아무리 요즘 글로벌 시대여서 세계가 한눈에 있다 해도 실질적인 40년의 문화 차이가 만만찮을 텐데 어떻게 한국의 지성 독자들을 대할지 염려가 된다. 하지만 나는 글로 지식이나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자위하고 용기를 내어본다. 비록 어눌한 글이어도 나의 진솔한 마음이 태평양 너머로 따뜻하게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잔잔하게 밀려드는 설레임, 가슴에 예쁜 꽃들이 하나, 둘 피어오른다. 새해에는 이 세상에 전쟁이 없고, 아픈 사람이 없고, 슬픈 사람이 없기를.. 온 누리에 평화와 행복만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2016년 새 달력을 건다.
<수필시대> 통권 66호 1/2 -2016
나의고백으로 심정의 문을 열어 볼까 한다.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거든 지난일에 너무 집착말며
화 내지도 말며 현재을 즐기면서 사람을 미워하지 말것
이것이 나의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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