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꽃이 양귀비꽃이라는 것을 캘리포니아에 와서 알았다.
동네 길을 걷다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파피꽃. 야리야리하니 곱긴 하지만, 절세미인의 상징인 양귀비꽃이라기에는 조금 미흡하게 느껴졌다.
십수 년 전 처음 가본 파피꽃 동산 랭캐스터, 부드러운 등성이에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 주황빛 붉게 물든 파피 언덕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람 살짝 불어 꽃잎 물결치는 광경에는 탄성이 나왔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랭캐스터 파피와 듬성듬성 피어있는 동네 파피가 같은 꽃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추억의 파피 언덕, 깜빡 절정기를 놓치는 바람에 몇 해가 훌쩍 지나갔다. 나이가 들어가면 한가해지는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지 각성하며 준비 땅, 하고 있다가 며칠 전 랭캐스터로 향했다.
주일 늦은 오후 한가한 시골길, 과일 칵테일을 파는 포장마차와 오개닉 꿀을 파는 길가 작은 트럭이 정겨웠다. 온 들판을 화려하게 수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파피'. 뜬금없이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도레미송 중의 '레미파파미레파'가 입에서 맴돌았다.
'양귀비' 영화도 떠올랐다. 중국 황실 영화의 전형처럼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장면이 많아 눈을 질끈 감고 보았던 영화. '천하를 뒤흔든 경국지색, 꽃으로 태어나 독이 되다' 영화 내용의 주제 구절에 고개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자는 자칫 독이 되는지 몰라도 랭캐스터 아름다운 자연은 즐거움만 안겨 주리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래전 감탄해 마지않던 그 언덕이 가까워져 오자 꽃구경 나온 사람과 길가에 빼곡하게 세워진 차가 파피꽃 시즌임을 실감케 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도 추억 속 촘촘히 들어찬 풍성한 파피꽃 언덕이 아니라 허연 땅바닥이 많이 드러나 있어 고개를 갸웃했다.
세월이 더해져 더 아름답게 추억된 건가. 오랜 가뭄 때문인가. 그래도 몇 해 만에 온 게 어딘데, 위로하며 나오는 길에 '엔틸롭벨리 파피 보호구역' 간판 안쪽 길을 따라 쑥 들어가 보았다.
세상에나! 커다란 주차장과 건물이 보이고. 붐비는 차와 사람들, 그리고 광활한 파피 언덕. 우린 그동안 주변만 맴돌다 갔던 것이다.
드넓은 대지 위, 캘리포니아 파피 최대 군락지로 오랜 세월 유지될 수 있었던 사연이 그곳에 있었다. 엔틸롭밸리에 거주하며 야생 꽃 그림 그리기를 즐겼던 제인이라는 여성의 헌신과, 재단을 만들어 제인의 뜻을 이은 또 한 명의 여성 도로시, 그 두 여성의 삶과 흔적이 꽃보다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그녀들의 열망을 상상하며 공원을 둘러보았다.
사나운 사막 바람에 납작 엎드렸다가도 때가 되면 화르르 무리 지어 피어나 자기 시절을 한껏 구가하는 야생화 파피. 단순히 꽃구경 잘했다로 끝나지 않는 긴 여운이 우리 뒤를 한동안 따라오는 것 같았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7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