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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장 작법론/정용진 시인

by 정용진 posted Dec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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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장작법 론>

문장 작법에 대하여

정용진 시인

 

문예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의 구성이다.

작가가 문장을 구성하기 위하여서는 주자공이 주자소에서 활자를 주조하기 위하여 금형(金型)을 만들고 금형에 쇳물을 붓고 모형을 다듬는 수고를 더하여 활자를 만들듯, 또 광부가 정금을 얻기 위하여 용광로에 광석을 넣고 풀무질을 하여 정금을 걸러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시란 직관의 눈으로 바라다본 사물의 세계를 사유의 체로 걸러서 탄생시킨 생명의 언어인 동시에 영혼의 메아리다.

그러므로

시인은 진실하고

소설가는 궁리(窮理)하고

수필가는 솔직해야 한다.

시가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이라면,

소설은 허구(虛構)를 통한 상상력과 사실(寫實)의 표현을 통하여 인생의 미()와 삶의 모습들을 산문체로 나타낸 예술이다. 한편

수필은 자연과 사물에 대한 자연스러운 서술이며, 진솔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시()의 연 속에는 맥()이 있어야하고,

소설(小說)의 문체 속에는 설()이 담겨져 있어야하고,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전개하여 나가는 것이 필수적 요건이다.

특히 에세이(隨筆)의 내용 속에는 리()가 있어야한다.

시를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진실의 맥박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수필을 읽어 그 속에서 문리(文理)를 찾을 수 없거나, 소설을 읽어 그 속에서 이야기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히 죽은 작품들이다.

()에 진실이 결여되면 미사여구(美辭麗句)의 언어적 나열이나, 짧은 글로 끝나기 쉽고, 소설이 지루하고 흥미가 없으면 사장(死藏)되게 마련이고, 수필이 자화자찬(自畵自讚)에 치우치거나 객관적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한시(漢詩)작법의 경우에는 첫 구에서 시의(詩意)를 일으키고, 둘째 구에서 받아, 셋째 구에서 변화를 주고, 넷째 구에서 문장의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필법을 바르고 정확하게 구현해야 한다.

 

특히 논설(論說)의 경우는

 

1) 시대성에 초점을 맞춰야한다.

2) 계몽주의적 정신에 입각해야한다.

3) 고금(古今)의 적절한 비유가 필요하다.

4) 문체에 힘이 넘쳐흐르고 제시하는 목표가 정확해야 한다.

5) 문장에 설득력이 있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강하게 제시해야 한다.

 

문장 구성의 핵심은 주제의 설정이요, 주제가 설정되면 후속으로 소재의 선택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는 마치 집을 짓겠다고 결정되면 어떠한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형태의 집을 지을 것인가를 설계하게 되고, 철근. 시멘트. 목재 등이 건축의 자재가 되듯 문장구성에 있어서도 글의 소재가 필요한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내면속에 깊숙이 숨기고, 비유하는 형상만 드러내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수사법(修辭法)의 은유(隱喩)가 핵심이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하여 원고지 앞에 펜을 들고 설 때에는 생명을 조각하는 심정으로 서야한다. 이는 마치 석공이 비석에 글자를 한자 한자 바로 새기기 위하여 서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교훈으로 유좌지기(宥座之器)란 명언이 있다.

내용인즉 공자가 제()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찾았는데 거기에 똑바로 서있지 않고 삐딱하게 서있는 잔 하나를 보았다. 관리인에게 그 연유를 물었더니 환공이 평소에 늘 아끼던 잔으로 속이 비어 있으면 기울어지고 물이 알맞게 차면 바로 서지만 가득차면 다시 기울어집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세상에 가득차고도 넘치거나 넘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차고 넘치면 모라는 것만 못하다. 하신 비유에서 유래한 명언이다.

문장 작법과 인간의 삶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이처럼 소중한 것이다.

나도 시와 수필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늘 근심하는 것은 다작(多作)은 수작(秀作)만 못하고 수작(秀作)은 심작(心作. 深作)만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항상 고민하고 있다.

모든 작가들은 이점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양이 어찌 질을 따르며 이를 감히 능가하겠는가.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등단의 영예를 얻고, 그 기쁨이 다하기 전에 종단 작품이 되는 뼈아픈 현실을 맞이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조건 시나 수필 혹은 소설 등을 양산해서 발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정 스님의 지적처럼 침묵의 체로 걸러서 탄생시키지 아니한 언어들은 소음에지나지 않는다.

나의 다작이 세상에 문학적 공해가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종이, 그 잉크, 그 노력의 낭비는 실로 마음이 차가운(寒心之事)일이다.

시조 창작의대가 초정 김상옥 시인은 시란 흙으로 빚은 도자기요,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시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과거에 출판한 자신의 여러 권의 작품집들은 다 무효이고 김상옥은 오직 느티나무의 말한권의 시조집만 남기고 떠난다. 강조하면서 오랜 시간 써서 모아 놓은 원고 일곱 가마니를 몇날 몇일을 걸려 내외분이 손수 찢어 버리면서 손이 부르텃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후 유작 운운하며 이런저런 작품들이 세상에 회자(膾炙)되는 것을 살아생전에 차단해 버리려는 작가의 고귀한 양심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진실해야 한다. ()이 곧 인()이란 지적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 명문과 고전은 무수한 노력과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여과되어 나오는 온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다.

얼마 전 한 젊은이가 경제적 여유로 자신의 저서를 수 만권 출판하겠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불행한사람 이구나 차탄(嗟歎)한 일이 있다.

무엇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썻느냐 가 중요하지 돈 많은 부호가 호화장정으로 펴낸 자서전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감지할 줄 알아야한다. 창작의 세계에서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르고, 깎고, 쪼고, 문지르는 것과 같은 피나는 노력만이 명작을 탄생시키는 첩경이다.

문학이란 자신의 마음과 가슴 속에 살아서 출렁이는 산 언어의 물결이다.

이는 반드시 용출하지 아니하면 못 견디는 활화산 같은 것이요. 토해내지 안으면 못 견디는 카타르시스( Katharsis 정화. 배설).

우리 모두는 언어와 문자를 통하여 나 자신을 남에게 표현하고 타인의 심정을 읽게 된다. 이것이 참 나의 표현이요, 타인의 재발견이다.

진정한 문학이 이룩되려면 대화(Dialogue)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나 그러나 때로는 대화가 아닌 침묵 과 독백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내 자신에게 조용히 물음을 던지는 이것이 곧 독백( Monologue)이다.

때로는 독백이 대화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대답이 어려울 때 조용히 웃고 마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 현명한 처사일 때가 많이 있다.

데카르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고성(思考性)은 곧 인간의 위대성이 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검은 침묵의 깊은 밤이 있을 뿐이다. 문학이 나무라면 가지는 소설이요, 잎은 수필이며, 꽃은 시다. 소설이 허구(虛構) 속에서 탄생 되었다면, 수필이 진실을 토대로 형성되는 산문이며, 시는 스스로 아픔을 무릅쓰고 군살을 도려내는 고통의 산물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시인은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상상의 여백을 남겨두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

한 작품 속에서 모든 말을 자신이 다 해버리겠다고 나선다면 군소리로 가득 찬 잡문이나 양산하는 삼류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작가에게서 자장 중요한 필법의 자세는 한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든 실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온갖 수식어와 명언명구(名言名句)를 나열하여 문장의 흐름 전체를 만연체(蔓延())로 만들어 그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곧 싫증을 느끼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항상 필자의 실력은 문장 전체를 통하여 은은하게 풍겨나야 한다. 이는 마치 등산을 할 때 산을 높이 오름에 따라 산의 위용이 거대하게 드러나 고귀하게 느껴지는 장중미(莊重美)의 발견과 같은 것이다. 시성 괴테가 알프스 산을 오르며 그 위용에 감동되어 모자를 벗고 절을 하면서 위대한 창조주시여 이런 명작을 만들어 놓고 어찌 말이 없으십니까.’ 탄복을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파우스트 같은 작품을 써놓고 만인들로부터 시성 괴테 소리를 듣는 것이 민망하여 나온 겸손일 것이다.

나는 시인을 농부에 비유하기를 즐겨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을 언어의 밭을 가는 쟁기꾼이라고 말한다.

1981년 첫 시집 강마을을 펴내고 로스엔젤에스 동쪽 온타리오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을 때 H일보 P기자가 나를 인터뷰하러 찾아왔다. 작업복을 걸치고 장화를 신고 땀을 흘릴 때 그 기자는 내게 물었다. 이렇게 바쁜데 언제 시는 쓰고 농사일은 하시느냐고? 나는 그에게 농사는 내 육신이 짓고 시는 내 영혼이 쓰지요.”라고 대답하니 아하 이런 분이시구나 하며 돌아갔다. 그 이후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육신으로는 농사를 짓고 시는 영혼이 쓰는 분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었다. 나는 이 말 한마디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나는 오늘도 거친 언어의 밭을 갈기 위하여 손에 쟁기를 쥐고 광야로 나간다. 시는 분명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붓을 들고 서재에서 창작에 정열을 기울일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 갑자기 유명해 지려고 소리치며 거리를 방황하거나, 단체를 만들어 장 자리를 차지하려하는 허식주의 작가는 역사 속에서 심판을 받게 마련이다.

뼈를 깎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피나는 노력과 심사숙고(深思熟考)의 고귀한 선비정신이 필요하다. 선비란 군자요, 지성이요, 엘리트요, 역사의 중심인물이다.

공자(孔子)가 제자에게 학구정신을 강조할 때에는 군자(君子)가 되라고 가르쳤다. 군자(君子)는 최고 지성의 상징이요, 엘리트로 사회적 표상이다. 이에 비유되는 말이 소인(小人)이다. 소인은 사회를 리드하거나 대업의 지도자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군자가 되려면 백련천마(百練千磨)의 피땀이 그의 삶속에 절절히 서려 있어야한다. 시인이나 문인들이 문장 한절, 시 한연 을 완성하기 위하여 고치고 다듬고 또 고치는 퇴고(推敲)의 연속은 명작 탄생의 지름길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듯 남도 나처럼 사랑할 줄 알아야 위인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와 애기애타(愛己愛他)는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가.

나는 최고이고 남은 별 볼일 없이 취급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다. 공자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 배우기 위하여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 곧 교학불권(敎學不倦)의 정신이다. 학이불염(學而不厭) 회인불권(誨人不倦),은 배울 때에는 염증을 느끼지 아니하고 가르칠 때에는 권태를 느끼지 아니한다는 의미다.

당송8대가의 한분인 한퇴지(韓退之)는 사설(師設)에서 성인무상사(聖人無常師)라고 가르쳤다. 성인에게는 별다른 스승이 없고 모두가 그의 스승리란 뜻이다. 성현 공자는 논어에서 세 사람이 길을 동행하다보면 반듯이 한사람쯤은 내게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焉)고 일렀다.

인간 행로에는 수시 도처에 나의 스승이 될 만한 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글을 사랑하고 글을 쓴다고 하면서 요란한 빈 수레바퀴의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리를 방황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시인이나 문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냉정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서야한다. 자고로 시. .. (詩書藝畵)는 선비의 길에 오르는 첩경이다.

문학은 세상을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삶의 모습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아로새기기 위하여 문학 창작의 기법이 필요하고 이 기법을 공부하는 곳이 학교의 문과요, 사회의 문장교실이다.

문학은 시. 수필. 소설. 희곡. 평론. 등으로 장르가 구분되는데 작가의 기호와 소양에 따라서 문학의 장르를 선택할 수 있고, 능력이나 재질이 있는 사람은 여러 장르를 택할 수도 있다. 어느 장르를 택하던 간에 자신의 작품에 성심과 정성을 다하여 명작을 창작해야한다.

이것이 문장 작법의 소중함이요, 참된 문인이 가야할 바른 길이다.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