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속살을 보여준 여자-고대진

by 미주문협 posted Jan 30,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속살을 보여준 여자                                      

                                                              고대진


70년대 내가 다니던 학과는 학교 정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과학관이란 건물에 있었습니다. 강의실 까지는 백양나무가 은행나무로 교체된 백양로를 따라 한참을 걸 어가야 했는데 길 주위에는 건물도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쌩쌩 거리는 바람이 이른 봄이나 늦가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움츠리게 만들곤 했습니다. 일학년 때였지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가을날 아침 일찍 이 길을 따라 강의실에 올라가고 있는데 펄럭이는 예쁜 분홍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내 앞에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긴 머리는 출렁출렁 걸음은 사뿐사뿐 청명한 가을날씨같이 산뜻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뒷 모습이 저렇게 예쁜 여자도 있구나…” 라고 감탄하며 걸음을 좀 더 빠르게 걸었습니 다.


앞 얼굴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더 니 그녀의 치마를 휙 들쳐 올렸습니다. 어맛-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올라간 치마를 얼른 감싸고 주저앉으면서 이 여학생이 한 일은 사방을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의 눈에 근처에 있던 유일한 증인이던 내가 들어 왔겠지요. 보았을까 말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듯 날 노려보는 이 여자의 얼굴은 뒷모습만큼이나 아름다웠습니다. 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고운 얼굴을 보면서 생글거리며 말했다. “전 아무것도 안 봤어요. 흰색 속옷은 더구나 못 봤고요...” 내가 여자에게 했던 첫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어머니만 빼고 말입니다. 다음날 연합채플시간에 친구들 과 함께 있던 그녀와 마주쳤습니다. 그녀가 날 알아보고 다가와서는 심각한 얼굴 표 정을 만들며 낮지만 성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다 봤죠? 책임지세요...” 갑자기 받은 공세에 당황한 내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뭘요? 안 봤다고 했잖아요.“ “남의 처녀의 속 살을 훔쳐보고도 치사하게 꽁무니를 뺀다 이거죠? 비겁하게 거짓말까지 하 기에요?“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난 졸지에 치 한에 비겁하고 거짓말하는 남자로 몰린 샘입니다. 내가 어수룩하게 보여서 촌놈이라 는 것을 확신하고 날 우습게 만들고 망신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도 버럭 화 를 내며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정 그러면 저도 속살을 보여주면 되잖아요. 자 보 세요. 총각 속살입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혓바닥을 길게 빼어 물고 내 속살을 보여주었습니다. 의사에게만 보여주었던 속살(혓바닥)을 그녀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은방울 구르는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목젖이 보일 만 큼 크게 입을 벌리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눈물까지 닦아가면서 나에게 두 번째 로 속살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나도 속살을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처녀의 속살을 두 번 본 대가로 난 그녀의 <보건 2> 과목의 파트너가 되어야 했습니다.


당시 여학생 들이 필수로 들어야 했던 <보건 2>라는 과목에는 반드시 남자 짝꿍을 데리고 가야 출 석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내가 그 짝꿍이 된 것입니다. 그 강의는 결혼을 앞둔 남 녀에게 결혼 예비교육을 시킨다는 취지에서 반드시 짝을 데려오라고 한 것이었지요.      

                                
아니 짝을 대려 오랬는데 동생을 데려 오면 어쩌나…하는 교수님에게 “우린 서로 속 살을 보여준 사이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여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그 과 목에서 나는 처음으로 육아 교육이며 성생활이며 피임 또 아이의 출산 과정까지 영화 로 보는 참 건강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속살도 서로 보여 주었겠다 아이 낳는 모습도 함께 본 사이가 되어버린 우리는 참으로 보아서 편하고 만나서 편하고 안 보 아도 또한 편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젊은 남녀끼리는 상대가 결혼상대라는 생각을 접 고 나면 무척 편안한 관계가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편안하다면 참 이상 한 말이지만 성숙했다는 말 혹은 겉늙었다는 말도 됩니다. 정말 이 여학생은 나에게 인생을 다 아는 것 같이 현명하고 노련하게 보였지요. 그 가을날 백양로에서 어린 동 생같이 보이는 내가 너무 개구쟁이 같이 까불어서 버릇 고쳐주려고 책임지라…고 했 었다고 고백하던 그녀도 지금 생각해보면 상긋한 냄새가 폴폴 나는 어린 봄나물 같은 나이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이 구름만큼이나 가득해야 할 나이였는데 그때 그녀는 좋은 짝을 만나 시집가서 안정된 생활을 찾을 꿈만 가득 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의 조건에 맞는 짝을 구해야 된다는 생각, 부모님을 생각해서 부모님이 만족하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등등으로 중매결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 고 있었고 누군가가 자기의 아름다움과 학벌과 집안 등등 모든 것에 적합한 사람을 소개해주어 손해보지 않는 결혼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 했습니다.


내가 대학원 에 가라는 이야기라도 하면 항상 “이 나이에 내가 뭐...” 라고 했지요. 야 이 나이 에 내가 뭔 공부고 유학이냐? 아니면 이 나이에 내가 뭔 연애냐? 시집이나 가지... 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말씀에 따라 자기 조건에 맞는 이 름난 부자 집 가문에 학벌 좋고 잘생긴 신랑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참 좋은 신랑을 만났다고 결혼식장에 찾아가 축하는 해주었지만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반드 시 우리가 서로 속살을 보여주었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녀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여름 동생들과 함께 모일 때였습니다. 나는 이런 여잔 싫 어 혹은 나는 이런 남자는 싫어 라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막내 동생이 “나는 푹 퍼 진 여자가 싫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푹 퍼진 여자? 엉덩이가 푹 퍼진 여자? 혹은 가슴이? 라고 말하며 웃고 있는데 말인즉 마음이 늙어 버린 여자라는 것입니다.


내 나이에 무슨 변화를... 내 나이에 무슨 사랑을… 하면서 고요하고 평안한 여생을 맞 으려는 사람, 아이까지 이렇게 잘 낳고 기르는 날 어쩔꺼야 혹은 이 나이에 날 어쩔 꺼야 자기만 손해지 뭐… 라면서 주저 앉아버리는 여자 말입니다. 그 말을 듣다가 갑 자기 “이 나이에 뭐...시집이나 잘 가서 살지...” 라고 말하던 나에게 속살을 보여 준 아름다운 그녀가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내 동생이 싫어하는 푹 퍼진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던 여자 쪽에서도 “나도 푹 퍼진 남자가 싫어요.” 라고 했습니다. 푹 퍼진 남자라. 흠... 혹시 요즘 점점 나오는 내 똥배 이야기가 아니었던가요? 아니었겠지요. 40대 이후의 그것은 인격이라고도 한다 지 않습니까.



-2017 문협월보 2월 회원 수필 감상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