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르완다를 다녀와서
이초혜
2017년 1월 중순에 나는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는 별명을 가진 작은 나라 르 완다의 수도 키갈리로 여행을 떠났었다. 남편과 나를 태우고 엘에이 공항을 향해 달려가던 셔틀 차 안에서 운전기사 흑인 청년이 우리에게 어디로 여행 을 가시냐고 물었고 난 르완다라고 대답하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라면 그런 곳엔 절대로 안 가겠노라 말해서 우리 모두 폭소를 터뜨렸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 내외가 거주하고 있기에 용기 를 낼 수 있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비행시간이 왕복 40여 시간이나 되고 중간에 네델란드의 수도인 암스텔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느라 지체한 시간까지 보태면 모두 마흔 일곱 시간이 걸렸다. 남편의 팔순을 기념하는 여행으로 그곳을 택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큰 제약회사의 중역으로 일했던 제부는 십 삼 년 전부터 키갈리국립 대학의 식품공학 교수로서 공로자로 인정받고 있다. 동생내외 덕분에 우리 는 지어주는 밥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마음 놓고 여행했고 견문도 넓어졌고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참 좋은 시간을 가졌다.
르완다는 스무 서너 해 전에 종족간의 대학살사건으로 석 달 동안에 백 만 이 넘는 희생자를 공식적으로만도 냈던 그곳-그때의 참상을 설명해주는 키 갈리 대학살기념관의 사진이나 유물...등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절감했으며 저들의 절규처럼 ‘다시는 그런 일 이 일어나지 않기를!’ 나 역시도 간절하게 염원했다.
약소국가의 설음과 빈곤의 악순환을 보면서 현재 우리나라가 코이카(한국국 제협력단)을 통해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교육, 기술, 농촌 새마을운동..등 을 돕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정보통신사(KT)의 투자로 인해 유선통신도 없던 나라에 현대의 무선통신 시대를 열었다. 그래서 전국 어디를 가든지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그 틈새를 이용해서 중국의 값싼 핸드폰 후웨이가 선전하며 광고지로 건물을 도배하고 있다.
전라도만한 크기의 작은 나라인 르완다에는 무려 1000 개의 산과 언덕 그리 고 수많은 호수로 이뤄진 땅인지라 산길을 따라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하 며 차를 몰아야만 했다. 모터싸이클이 대중교통의 주된 수단으로 등에 애기 를 업은 여인들이 머리엔 커다란 짐 보퉁이를 이고 손에도 들고 실내화난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민망하고 안쓰러웠다. 그들의 주식은 바 나나, 감자, 고구마, 옥수수로 빈곤하여 하루 한 끼로 배를 채우는 형편이 다. 하지만 빈부차가 엄청나게 심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벨기에 사람들이 쓴 불란서 어와 자기들의 말과 그리고 영어 를 섞어서 쓰고 있으며 세 종족이 섞여서 함께 살아간다. 제노사이드_그 대 학살사건 이후 과거사는 잊고서 용서와 화합으로 전진하는 저들 모습을 보 며 나는 자꾸만 우리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고 있었다. 삼 주 동안 현장 실습하고 난 결론은 모두가 한 지붕 밑에 사는 한 인간가 족임을 느낀다. 이제부터는 세계가 평화롭게 서로 돕고 다투지 말기를 그리 하여 검은 대륙 아프리카란 말 대신에 아름다움 가득 찬 하나님의 땅이라 불리우게 되기를 소원한다.
바다 같이 넓고 맑은 호숫가에 앉아 구운 도미를 먹던 기억, 즐겁게 노래하 던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키갈리 영성일기와 시의 접목을 강의한 일 등 등... 비 내린 후 햇살 가득 찬 가슴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시종일관 동행 해 주신 주님께 뜨겁게 감사를 올린다.
문협월보 3월호 회원수필 감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