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 명시감상:
그리운 자작나무
정호승
자작 자작
너의 이름을 부르면
자작 자작 살얼음판 위를 걷듯 걸어온
내 눈물의 발소리가 들린다
자작 자작
너의 이름을 부르면
자박자박 하얀 눈길을 걸어와
한없이 내 가슴 속으로 걸어들어온
너의 외로움의 발소리도 들린다
자작나무
인간의 가장 높은 품위와
겸손한 자세를 가르치는
내 올곧고 그리운 스승의 나무
자작 자작
오늘도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살아온 눈물의 신비 앞에
고요히 옷깃을 여민다
----정호승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에서
부자로서 죽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고,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죽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부가 세습되면 그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중되고, 총과 칼을 든 생계형 범죄자들이 날뛰게 될 것이다. 사상과 이론은 모든 학문의 목표이자 최고급의 지혜의 열매라고 할 수가 있다.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한평생 타인의 사상과 이론만을 파먹고 살아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높은 품위”, 즉, 인간 중의 인간은 사상가이며, 이 사상가는 성자와도 같은 인간을 말한다.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인간의 자기발견을 이룩해냈던 데카르트, 유일신에 반대하고 만유신론을 역설했던 스피노자, 예정조화설의 창시자인 라이프니츠, 비판철학을 정립했던 칸트, 공산주의 사상을 정립했던 마르크스, 유교사상을 정립했던 공자, 무위사상을 정립했던 노자 등----. 이 최초의 진리의 창시자들의 크기는 위대함의 크기이며, 그 업적은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기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사상가들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듯이, 자기 자신의 선행으로 군림하지 않은 인간이며, 타인과 타인들, 즉, 만인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더없이 낮추는 겸손함의 예법을 갖춘 인간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작나무는 “내 올곧고 그리운 스승의 나무”이며, 그 모든 재산을, 그 모든 지식을 다 주고 떠난 사상가이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을 벗겨서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면서 타기 때문에 ‘자작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나무껍질은 흰빛을 띠며 옆으로 얇게 종이처럼 벗겨지고, 나무껍질이 아름다워 정원수와 가로수와 풍치림으로 많이 심는다고 한다. 나무껍질은 화피樺皮라 하여 약재로 사용되고, 자작나무 수액은 그냥 마시거나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목재의 질은 견고하고 질겨서 건축재, 조각, 목기, 펄프원료 등으로 쓰이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의 목판도 그 일부는 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익생양술대전}).
자작나무는 전형적인 한대림의 나무이며, 그 하얀 껍질은 순결, 혹은 성스러움의 상징이 된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자작 자작 살얼음판 위를 걷듯” 살아온 나무,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가장 높은 품위”에 올라가 더없이 “겸손한 자세를 가르치는/ 내 올곧고 그리운 스승의 나무,” 고통으로 밥 먹고, 고통으로 숨을 쉬며, 그 고통 속에서도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 세상을 찬양하고, 그 결과, 자기 자신의 그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간 자작나무----. 자작나무는 정호승 시인의 스승이고, 정호승 시인은 자작나무의 제자가 된다.
‘자작자작’은 자작나무껍질이 타는 소리이기도 하고, ‘자작자작’은 언제, 어느 때나 “살얼음판 위를 걷듯” 살아온 시인의 ‘눈물의 발자국’ 소리이기도 하다. 언제, 어느 때나 고통은 처절하고, 언제, 어느 때나 이 세상의 삶은 아름답고 풍요롭다. 최초의 진리의 창시자, 즉, 모든 사상가들은 이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다가 행복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의 연출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고통을 다스릴 줄 아는 자이고, 우리는 그를 사상가라고 부른다.
자작자작----, 자작나무는 고귀하고 위대하다. 이 자작나무 앞에 서면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고, 이 눈물은 고귀하고 위대한 스승 앞에 바치는 천금千金과도 같은 존경의 표시가 된다.
자작자작----,
오오, 참다운 스승과 참다운 제자의 징표인 자작나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