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길이와 치마폭과 인심 / 성백군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옷이 흠뻑 젖었다
내 어릴 적
고향 마을은 가난했지만
지붕마다 처마가 있어
비가 오면 피하며 잠시 쉬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백배는 잘 사는데
눈 씻고 봐도 처마는 없다
지붕 위에 화단은 있지만, 처마는 없다
처마가
인심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
내 마음엔 잘 살수록 점점 저만 알고
인심이 각박해지는 세상 같아서
느닷없이 오늘처럼 비를 맞는 날이면
피할 처마가 있는 옛집이 그립고
까닭 없이 비에게처럼 남에게 당하다 보면
꼭 낀 짧은 치마를 입고 몸매 자랑하는 젊은 여자보다는
폭넓은 한복 치마를 즐겨 입으시고
그 폭으로 늘 나를 감싸주시고 보호해 주시던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평생 화장품 한번 안 쓰셨던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보기에 좋다고, 살림이 넉넉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사는 게 좀 그렇다
813 - 0428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