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전설』은 아주 낡고 오래된 책이다. 책이라 보기에는 얇고 볼품이 없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김동찬 시인과 함께 묶은 2인 시집이다. 편집은 1976년 2월 22일, 인쇄는 1976년 2월 25일, 총 76페이지 신국판 보다 조금 작은 시집이다. 직접 필경을 하여 등사기로 밀어내어 200부 정도를 찍어낸 한정판 시집이다. 자금 조달은 김동찬 시인이 했고 내가 원고를 긁고 등사해서 제본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며 좋아했던 기억이 새롭다. 말하자면 김동찬 시인과 나의 문학 출발점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시집이다. 나는 17편, 김동찬 시인은 15편을 실었다. “바람은 전설을 만들고, 하늘이 준 마알간 情들은 사물의 어딘가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라는 자서도 보이고 후기에는 “우리의 시가 몇 字의 言語로 규정지어지는 게 싫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의 기억에고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아름다웠던 하나의 傳說, 제목 없는 전설로 만족하고 싶었다”라고 시집 제목의 변을 적고 있다. 시집의 겉표지는 고민을 하다가 등사 잉크를 손바닥에 발라 찍어낸 것이다. 둘이서 대견한 듯 마주보고 웃던 일 어제 같다. 자금 조달을 맡은 김동찬 시인은 그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솔로SOLO”라는 청바지를 만드는 회사를 차려 돈을 좀 벌었고, 시인으로 등단하여 시집과 시조집을 내고 현재 미구 문인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잡지 계간 《열린시학》의 편집인을 맡고 있다. 시가 좋아 시를 읽고 시를 얘기하고, 시를 쓰면서 아름다운 방황을 하던 시절. 아무런 화려함도 없었지만 순수함이 있었고 따뜻한 정열이 넘쳤던 그때.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낡은, 내게도 한 권 밖에 없는 이 시집을 기꺼이 한국 예술가 애장 박물관에 내어 놓는다. / 이지엽 시인<한국예술가 애장박물관 제공> 2009/06/01 [14:51] ⓒ 독서신문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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