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싶은 가을

2007.10.12 23:38

김동찬 조회 수:772 추천:87

   몇 년 전 가을, 경복궁 옆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한 문학행사에 참석했다. 좌장격인 정완영 원로 시인이 인사말을 했다.  
   “오는 길에 보니 나뭇잎들이 단풍이 들어 떨어지고 있습디다. 우리들 인생도 이처럼 언젠가 헤어지고 떠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주위의 사람들이 다 예뻐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가을은 사랑하고 싶은 계절입니다. 더욱이 우리 사랑하는 문인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라니 더 빨리 가서 만나보고 싶어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행사장을 나오며 어둑한 경복궁 돌담길을 바라보니, 은행나무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자꾸만 노시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입대를 하루 앞둔 오래 전 가을날 경복궁 앞을 노랗게 물들이던 그 은행나무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내 청춘의 옷깃에 스며들던 그때의 쓸쓸하고 서늘한 바람도 느껴졌다.
   이파리들이 단풍들어 우리를 떠나는 계절이 되면 누구나 조금씩 감상적이 되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먹고 사는 일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생각, 한 때 움켜 쥐어보았던 부와 명예 등도 한 장 이파리로 가볍게 마르는 것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문득 덧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마 들고 있던 단풍잎을 바람에 날려보내고 나면 빈 손이 허허롭기 짝이 없다.
   연세가 지긋하신 원로 시인뿐만 아니라 아직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문학 소년, 소녀들도 가을이 되면 바람에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쓸쓸하게 떠나야 하는 우리 존재를 떠올린다. 찬바람에도 눈물짓고 시인지 낙서인지 모를 구절들을 끄적인다. 아마 문학은 그렇게 가을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유한하고 한없이 작은 우리 존재에 대한 자각은 이 짧은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옷깃을 스친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발전한다. 어차피 잠시 만났다 헤어질 인연들이라면 싸울 것은 무엇이고 미워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가을은 사랑하고 싶은 계절’이라고 말씀하셨나 보다.
   노시인이 사랑하는 문인들을 만나는 자리에 발걸음을 재촉했다는 부분도 나에게 꼬리를 문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 문인들이 만나는 자리에 내가 발걸음을 재촉했는지 자문해본다.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발걸음을 빨리 하기는커녕 발걸음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한 적도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라고 단순하게 대답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아직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작고, 아직 가을의 쓸쓸함을 사랑의 단계로 끌어올리지 못한 사유의 결핍에서 일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낯선 사람들도 사랑하고 싶은 계절에, 문학이란 배에 동승하고 있는 우리 문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겠는가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태평양을 건너와 영어권인 미국에 살면서 모국어로 함께 글을 쓰는 분들과는 반갑고 사랑스러운 친구요 동지요 형제와 같아야 하리라. 그런데 나뿐만이아니라 우리 미주문단은 통합된 단체로 힘과 마음을 모으자는 의견이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단체는 더욱 늘어가고 있는데다 단체 간, 문인 간의 갈등이 그치지 않으니 참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랑하고 싶은 계절, 가을을 맞아 문인들끼리 서로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길동무가 되어주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보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우리 사랑하는 문인들을 만나는 자리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미주문학> 2007년 가을호,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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