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문학 여름호 계간평을 읽고

2008.07.12 00:21

최정열 조회 수:96 추천:6

임헌영님 비평 '극무의 초인'에 대해.. 극무(極無)란 무엇일까? 과연 이 극무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야만 하는가? 물론 그것이 제목에 나와 있으니 이것을 독자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에 나는 새가 왜 동쪽으로 날아가는가, 또는 서쪽으로 날아가는가를 따지기 어렵듯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들을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특히 단편소설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단편소설이 아주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조각의 기법에 토르소라는 것이 있다. 모든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가장 아름다운 곳만을 부각시키는 기법이다. 토르소에서 모든 부분을 다 표현한다면 그 아름다운 부분을 부각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극무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음양가나 도가에서 나오는 태극은 무극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무극은 천지가 혼몽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태극과 무극의 상관관계는 성경에서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다는 것과 그 의미가 상통된다. 태극은 사각형으로 표현되고 그것은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태극에서 양의가 형성되고 양의에서 오행이 나온다라는 말은 천지의 조화가 바로 태극에서 나왔으며 그 태극은 바로 무극에서 왔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무극은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이다. 음양가나 도가에서 나오는 태극은 무극에서 바로 발전해서 태극이 된다. 하지만 우리 고유 종교에서 나오는 태극은 무극에서 반극으로 반극에서 태극으로 발전하는 형식을 취한다. 도형으로 말한다면 무극은 원형, 반극은 삼각형, 태극은 사각형으로 표현된다. 이런 무극의 전에 있었던 상태를 극무라고 한다. 극을 뛰어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극무에 존재했을 것 같은 초인을 '극무의 초인'에서 한번 표현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 소설은 무대나 시기가 잡혀질 수가 없다. '극무'의 상태를 표현해 보고자 함이니 그 시기와 무대가 잡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태까지의 비평가들이 보던 관점인 시기, 무대, 인물, 장소, 관점 등을 다 만족시키는 소설이라면 그것은 교과서일 뿐이다. 소설가는 항상 방황을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을 비평가들의 관점으로 비판한다면 더 이상 좋은 실험 소설이 나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소설은 '철학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이해와 공감대가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 기독교 소설이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듯이, 철학소설도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소설이건 모든 대중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만약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 통속소설을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에서 두 남녀의 열애라는 것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열애를 꿈꾸는 독자들은 절대로 '철학소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소설가들도 그렇고 비평가들도 그렇듯이 모두는 여태까지 자신들이 했던 범주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소설을 쓰거나 비평을 한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새로운 시도는 하찮은 글 장난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전과 새로운 시도가 없이는 새로운 글들이 나올 수 없다. 자신의 잣대로 비춰지는 것만을 진리라고 하는 편협한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더 나은 소설, 더 나은 비평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눈을 키워야만 한다. 이 소설은 편집과정에서 결론부분이 잘렸기에 이런 모호한 색채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는 정말로 새로운 시도의 소설을 준비하면서 글을 마친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7.07

오늘:
1
어제:
43
전체:
36,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