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2 16:18
(2004-09-19 09:13:00, Hits : 171, Vote : 19)
달팽이, 生
전 주 호
시골집 뒤안, 장독대 옆에서 소금물에 한 나절 절여놓은 배추를 씻고
있을 때였다. 땅속에서 몇 년은 착실히 견뎠을 것 같은 달팽이 한 마
리, 뜯어 내던진 퍼런 배추 겉잎 더미 쪽으로 기어들었다. 유난히 무거
워 보이는 달팽이의 집(生은 버거울수록 두려운 법이지). 달팽이의 몸
집에 놀란 나는 가만히 등껍질을 살펴보았다. 마치 시계 태엽을 감아
놓은 듯 나선형으로 굽이쳐 돌아간 나이테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화사한 햇살에 달팽이가 돌고 돌아온 축축한 길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그때, 달팽이는 안테나의 주파수를 맞추듯 더듬이에 온 촉각을 세우
고 뜯겨진 배추잎 같은 生을 조심스럽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군데군
데 파먹혀 구멍이 숭숭 뚫리고 간혹 애벌레가 잎맥 사이에서 꿈틀거리
기도 하는 생생한 배추잎 한 장.
아무렇게나 뜯겨 내던져진 배추잎 겉장 같은 내 삶이 두 가닥으로
세워진 더듬이 촉수에 낱낱이 읽혀지는 순간, 난 서둘러 물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배추를 건져내어 플라스틱 소쿠리에 받쳐 놓았다.
급히 나를 읽어버린 달팽이 한 마리, 이끼가 퍼렇게 돋아난 돌담 쪽
으로 기어들고, 등짐을 지고 막 나가려던 아버지, 고개 돌리고 가엾다
는 듯 내 쪽을 오래 오래 쳐다보셨다
달팽이 등껍질에 굽이쳐 흐르는 나선형 갈색 줄무늬처럼
내가 돌고 돌아나가야 할 生은 그때 아직도 멀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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