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

2009.11.15 15:00

강성재 조회 수:513 추천:99

낮은 음계의 음악을 듣습니다
병든 잎새가 연주하는 차가운 음색
음절의 마디 마디에 당신의 이름을 적습니다
첼로였나요, 묵직한 음색이 장중하게 저물던 봄 날
붉은 해를 퉁겨 올리는 샛강의 숲속에서
함께 암송하던 꽃말들을 생각 합니다.
눈가에 주름 잡히는 작은 떨림을,
머리칼 한올 한올의 흔들림을 쓸어 올리던
당신의 손끝을 생각 합니다

잠자리 날개에 설레는 동요는 없었지요
거미줄에 고단한 바람과 덫에 걸린 동화,
쉬임 없이 수맥(水脈)을 찾아 한잎 두잎 엮어 갔습니다.
빛이 죽은 잎새의 뒷장을 바람이 훔치고
새를 나비를 풀벌레를 낚아 내려도
당신을 읽지 못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부재중이었지요

너무 늦었나요
잎새에 내리는 눈물을 읽으며 그제서야
마지막 기도처럼 어린 햇살을 보내지만
당신의 머리카락 잠시 솎다 갈 뿐
어느새 나는 이정표도 없는 늪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늪은 깊었지요
새들이 둥지를 찾아 저마다 떠나가버린 어두운 숲속에서
뒷장을 펄럭이며 떨어져 내리는 당신을 읽습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 마다
온 몸을 적셔 오는 매서운 한기(寒氣),
그제서야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 했습니다

어둠이 내린 샛강의 숲속엔
또 하나의 설화(舌禍)만 무성 할 뿐
우리가 함께 읽어야할 동화는 이제 없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0 겨울나무 강성재 2008.02.15 521
199 눈덮힌 나목(裸木)의 풍경 강성재 2008.02.15 520
198 분재 강성재 2009.02.17 514
197 사십오년, 그후 강성재 2007.06.21 514
» 황혼이혼 강성재 2009.11.15 513
195 [3] 강성재 2008.10.31 513
194 홈 리스 리사(Lisa) 강성재 2009.09.14 510
193 다듬이 소리 [2] 강성재 2007.11.16 510
192 돌담 [2] 강성재 2006.11.21 510
191 먼 훗날 강성재 2009.06.13 509
190 혼돈의 깃발 강성재 2008.02.08 507
189 정토(淨土)로 가는 길 강성재 2007.11.16 504
188 쉰여섯의 참회 강성재 2009.03.27 502
187 아름다운 여자 강성재 2008.12.03 501
186 선물받은 시집 강성재 2009.02.03 498
185 안개속의 콜롬비아강 강성재 2006.03.24 498
184 김칫독 김치맛 [2] 강성재 2008.02.20 496
183 천년협곡에서 강성재 2009.10.10 495
182 정월대보름달 강성재 2009.01.30 494
181 아이들이 없는 학교 강성재 2007.10.21 493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8.05

오늘:
0
어제:
0
전체:
48,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