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의 옛 기억들
오정방
동해안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새삼 얘기하지 않더라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가보지 못한 금강산 앞바다 해금강을 비롯한 북녘땅의 경관이야 여기서
얘기할 수 없지만 내가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서울을 오갈 적이면 매 번
그렇게 보고 아름답게 동해를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드넓고 푸른바다, 그 해안선을 따라 올망졸망 들어선 바닷가 마을들,
굽이굽이 돌아가며 오르고 내리 달릴 수 있는 지방도로, 그 도로를 동승
하여 함께 인사를 나누던 고향사람들의 훈훈한 인심, 어느것 하나도 기억
에서 버릴 수가 없다.
지금은 교통사정이 너무나도 좋아졌다고 멀리서 듣고 있지만 6,70년 대, 그
때만해도 서울을 내왕하는 교통편은 썩 좋지를 못했다. 서울을 향해 떠날
때는 대부분 나는 새벽 첫차, 또는 그 다음 버스편을 이용하였는데 내고향
울진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삼척, 강능을 거쳐 마장동 종합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하루 해가 다 기울었다.
눈을 비비며 새벽잠을 깨우면서도 고향을 더나올 때, 나는 언제나 바다쪽을
향해 자리를 잡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바다경치를
더 바라보고 마음에 담아두고자 함이었다.
동햇가에서 태어나 철이 들도록 장성하기까지 늘 바다를 동무하며 자란
탓도 있지만 한 번이라도 더 떠오르는 동해의 일출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더 솔직한 말일게다.
동해의 일출 모습, 그대는 그 장관을 본 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몇 번이나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볼 때마다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샘솟지 않던가?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수평선 너머에서 마치 바닷물에 멱을 감고 막 솟아
오르는 그 싱싱한 태양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나는
참으로 많이도 감탄하고 또 찬미하였느니라.
동해에 얽힌 또 하나의 다른 얘기는 열 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공부하고 공군에 복무하여 병력도 필하고난 몇 해 뒤에 지금의 아내가 된
규수를 만나 교제하면서 앞으로 시어머니될 우리 어머니에게 첫대면을
시켜야할 시기가 되어 장인 장모될 어른에게 승락을 받고나서 함께 대관령을
넘고 강능을 거쳐 울진 고향으로 갔는데 서울에서만 자란 이 소녀는 동해
바다를 처음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탄을 하게 되었다는 후문을
들려줬다.
때는 여름이라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켜드리고 내가 태어났던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 푸른 바다를 수영하며 수경을 씌우고 바다 밑을 바라
보게 하였는데 바닷속에 넘실대는 해초하며 잔잔한 물고기들이 춤을 추며
다니는 것 하며 태양이 물속을 뚫고 들어온 색다른 광채하며 너무나 신기해
또 한 번 감탄을 터트렸었다. 그 날 그 여름밤에 반짝이는 별들을 머리에
이고 적당히 출렁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가 백사장에 멍석을 깔고
친척들과 나란히 자게 되었는데 그밤따라 나는 어릴 때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푸근히 잤거니와 스무 한 살 처녀는 전혀 처음 있는 일이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더라는 얘기를 두고두고 나에게 해주었다. 동해는 나에게
그러한 또 하나의 추억이 있는 바다이기도 하다.
나는 60을 넘기며 살아오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한국에 태어난 것을 원망해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이라도 시골, 저 울진의 동햇가 해 떠오르는 바닷가
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인력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창조주의 절대 권한이므로 묵묵히
순응할 도리밖에 없는 일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출생지에 대하여 큰 축복을
받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터이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죽을 때까지도 변치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민생활은 아무리 잘살아도 늘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좀 편히 산다
하더라도 내 고국에서 사는 것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민자들의 생각과 계획,
살아가는 모습은 다 다를 수 있긴하지만 나는 미국시민권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여태까지 영주권만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고국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고 가능하면 내 나라 땅에서 죽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굳이 시민권이
무슨 소용일까 해서다.
지금도 내가 태어난 고향 바닷가에 생가가 그대로 있거니와 언젠가는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 여생을 마친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마침 생가 그 뒷산에 선영이 있어서 조상들이 다 잠들어 있기도 하지만 자상한
가형이 뒷날을 염려하여 이미 우리 형제, 사촌들의 묘역까지 모두 준비해 두고
있으니 큰 일을 당한들 누울자리 때문에 크게 걱정할것이 없으니 이 또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푸른 동해 바다의 일출광경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철석대는
파돗소리가 다정하게 귓가를 맴돈다.
나는 내 고국, 내 고향, 그리고 내가 태어난 마을 그 동해바다를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사랑할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 마지막날까지…
<2004. 3. 8>
오정방
동해안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새삼 얘기하지 않더라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가보지 못한 금강산 앞바다 해금강을 비롯한 북녘땅의 경관이야 여기서
얘기할 수 없지만 내가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서울을 오갈 적이면 매 번
그렇게 보고 아름답게 동해를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드넓고 푸른바다, 그 해안선을 따라 올망졸망 들어선 바닷가 마을들,
굽이굽이 돌아가며 오르고 내리 달릴 수 있는 지방도로, 그 도로를 동승
하여 함께 인사를 나누던 고향사람들의 훈훈한 인심, 어느것 하나도 기억
에서 버릴 수가 없다.
지금은 교통사정이 너무나도 좋아졌다고 멀리서 듣고 있지만 6,70년 대, 그
때만해도 서울을 내왕하는 교통편은 썩 좋지를 못했다. 서울을 향해 떠날
때는 대부분 나는 새벽 첫차, 또는 그 다음 버스편을 이용하였는데 내고향
울진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삼척, 강능을 거쳐 마장동 종합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하루 해가 다 기울었다.
눈을 비비며 새벽잠을 깨우면서도 고향을 더나올 때, 나는 언제나 바다쪽을
향해 자리를 잡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바다경치를
더 바라보고 마음에 담아두고자 함이었다.
동햇가에서 태어나 철이 들도록 장성하기까지 늘 바다를 동무하며 자란
탓도 있지만 한 번이라도 더 떠오르는 동해의 일출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더 솔직한 말일게다.
동해의 일출 모습, 그대는 그 장관을 본 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몇 번이나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볼 때마다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샘솟지 않던가?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수평선 너머에서 마치 바닷물에 멱을 감고 막 솟아
오르는 그 싱싱한 태양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나는
참으로 많이도 감탄하고 또 찬미하였느니라.
동해에 얽힌 또 하나의 다른 얘기는 열 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공부하고 공군에 복무하여 병력도 필하고난 몇 해 뒤에 지금의 아내가 된
규수를 만나 교제하면서 앞으로 시어머니될 우리 어머니에게 첫대면을
시켜야할 시기가 되어 장인 장모될 어른에게 승락을 받고나서 함께 대관령을
넘고 강능을 거쳐 울진 고향으로 갔는데 서울에서만 자란 이 소녀는 동해
바다를 처음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탄을 하게 되었다는 후문을
들려줬다.
때는 여름이라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켜드리고 내가 태어났던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 푸른 바다를 수영하며 수경을 씌우고 바다 밑을 바라
보게 하였는데 바닷속에 넘실대는 해초하며 잔잔한 물고기들이 춤을 추며
다니는 것 하며 태양이 물속을 뚫고 들어온 색다른 광채하며 너무나 신기해
또 한 번 감탄을 터트렸었다. 그 날 그 여름밤에 반짝이는 별들을 머리에
이고 적당히 출렁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가 백사장에 멍석을 깔고
친척들과 나란히 자게 되었는데 그밤따라 나는 어릴 때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푸근히 잤거니와 스무 한 살 처녀는 전혀 처음 있는 일이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더라는 얘기를 두고두고 나에게 해주었다. 동해는 나에게
그러한 또 하나의 추억이 있는 바다이기도 하다.
나는 60을 넘기며 살아오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한국에 태어난 것을 원망해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이라도 시골, 저 울진의 동햇가 해 떠오르는 바닷가
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인력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창조주의 절대 권한이므로 묵묵히
순응할 도리밖에 없는 일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출생지에 대하여 큰 축복을
받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터이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죽을 때까지도 변치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민생활은 아무리 잘살아도 늘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좀 편히 산다
하더라도 내 고국에서 사는 것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민자들의 생각과 계획,
살아가는 모습은 다 다를 수 있긴하지만 나는 미국시민권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여태까지 영주권만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고국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고 가능하면 내 나라 땅에서 죽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굳이 시민권이
무슨 소용일까 해서다.
지금도 내가 태어난 고향 바닷가에 생가가 그대로 있거니와 언젠가는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 여생을 마친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마침 생가 그 뒷산에 선영이 있어서 조상들이 다 잠들어 있기도 하지만 자상한
가형이 뒷날을 염려하여 이미 우리 형제, 사촌들의 묘역까지 모두 준비해 두고
있으니 큰 일을 당한들 누울자리 때문에 크게 걱정할것이 없으니 이 또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푸른 동해 바다의 일출광경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철석대는
파돗소리가 다정하게 귓가를 맴돈다.
나는 내 고국, 내 고향, 그리고 내가 태어난 마을 그 동해바다를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사랑할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 마지막날까지…
<2004.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