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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들, 내 첫 손자와의 첫 만남

by 오정방 posted Aug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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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들, 내 첫 손자와의 첫 만남

  오정방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기쁜 일을 만나는 때가 적지아니
있는 가운데 손자/녀를 보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8년 전에 첫 외손녀(해나)를 본 뒤2년 터울로 다시
외손녀(리아)를, 그리고 다시 2년 터울로 친손녀인 찬미와 은미를
각각 얻었다. 저들의 재롱을 보다보면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싶은 가운데 아들이 지난 2월에 며느리의 임신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들을 낳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또 아기를 가졌는가고는 말했지만
혹시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없지도 않았다. 그래서 며칠 뒤에 아래와 같이 ‘아들의 반란’이란
졸시를 쓰게 되었다.  


1960년대 말,‘70년대 초 내 신혼시절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는 보건부의 산아제한 표어가
늘상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구촌의 인구팽창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참으로 옳은 말이다 싶었던 어느 여름 날
예비군훈련장 한 켠에 세워둔 병원차에선
정관수술 독려방송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3년 터울로 이미 남매를 낳은 뒤인지라
식구에겐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사전 의논 한마디 할 사이도 없이
한창 생산력 왕성하던 그 젊은 시절에
생산의 길목을 용감하게 차단해 버렸다
낳은 남매 사랑을 먹고 탈없이 잘 자라
최고학부를 나온 뒤에 각각 짝을 만나서
제 자식들을 낳아 내 품에 안겨준 손녀만
양쪽에서 둘 보태기 둘로 넷이 되었다
너무 험한 세상이라 성별 가리지 말고
자식은 둘만 있으면 족하다고 일렀건만
어느 날 아들녀석이 무언의 반란으로
생각지 않던 셋 째를 덜컹 갖고 말았다
손녀가 될지 손자가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주신 생명 감사히 받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하나님이 이 번에 손자를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2005. 2. 25>

                                 -졸시 ‘아들의 반란’ 전문


해산 예정일은 7월 15일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진통이 있어 병원에
왔다는 연락을 아들로부터 받고는 며느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진통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고 진통이 올 때 잘 견디게 힘을 달라고,
두려움 없이 해산에 임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아기를 자연분만으로
순산케 해달라고 빌었다.
아들은 시간 시간 상황을 알려왔고 드디어 미국시간 7월 12일(음 6.
7/화) 오후 4시 25분에 정상적으로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기쁜
연락을 받았다. 산모여시 건강하단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고 친할머니인 아내는 며느리가  먹을 미역국을 끓여 빈센트
병원(959호)으로 함께 가서 며느리에게 애썼다는 얘기를 먼저하고
친손자 선식善植(미국명 David)이와 첫 대면을 했다. 내 아들의
아들인 내 손자는 아직은 눈도 뜨지 않은 채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았는데 이목구비가 뚜렸하고 볼에 살이 통통하게 졌는데 살결도
빨간 것을 보니 나중에 살결이 고울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며느리가 순산을 한 데에 감사하고 아기가 모든 것이 정상적이어서
더욱 더욱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잘 자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주의 온전한 백성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했다.
손자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말은 못하고 ‘앵’하고 한 번 울어보였다. 귀여운 것.

이쯤에서 옛날 내가 자녀를 얻을 때 생각이 난다.
첫 딸을 낳은 때는 1969년 11월 19일이었는데 그날은 인간이 달에
도달한 날이었다. 전날 늦게 퇴근하니 아내는 이미 진통을 느껴
해산차 을지로에 있는 박영하산부인과로 간 뒤였는데 통행금지에
걸려 나는 꼼짝을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병원으로 가니 그 때까지
진통을 했다. 잠시 직장에 갔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가니 장모님이
‘딸은 살림 밑천이라네’ 라고 말해주었고 아내의 입원실로 가니까
산모옆에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딸애가 누워 있었다.
그 때 아내에게‘참 수고가 많았소’하고 얘기를 해야 했었는데
경험이 없는지라, 스물 아홉의 아기 아비는 그저 눈웃음만 주었다.
말은 않았지만 아내는 딸을 낳아 미안한 듯 하였고 나도 아들을 많이
기대했다가 딸이라는말에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 딸이 잘
자라서 지금까지 그렇게 친정부모에게 잘하는 것을 보면 장모님의
말은 적중했다 할 수 있다.
둘 째는 아들이었는데 3년 뒤인 1972년 11월 4일에 연희동 동네에 있는
차순자산부인과였다. 전날 밤 12시쯤 산기가 있다고 하면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자고있는 나를 깨워 병원으로 함께 천천히 걸어갔다.
통금시간 이었고 자동차도 없어서 20분쯤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진통을 하는데 이 번에는 아들인가 딸인가 궁금하여 여의사에게
물어보니 ‘아들이라 생각하고 기다리세요’ 하는데 아침 5시경 해산
하니 아들이었다. 의사가 다시 하는 말은 ‘보세요, 내가 아들이라
그랬지요?’였다. 그래서 컷트비로 5천원을 더 지불했다. 나는 혼자
집으로 와서 친척들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전화통을 붙들고 시간 가는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아들이 무었인지? 바로 그 아들이 오늘 딸, 딸에
이어 세 번째의 아기로 아들을 낳은 것이다.
태어난 새아기 선식이는 고려 군기감軍器監을 지내신 시조始祖 인자
仁字, 유자裕字 할아버지의 30대 손孫이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는
섭자燮字 돌림이고 아버지 형제들은 하자夏字 돌림이고 우리 형제는
흥자興字 돌림이다. 사실 나도 족보에는 항열에 따라 흥정興正이라고
올라 있다. 아들 형제는 규자圭字 돌림인데 오늘 태어난 선식이는
사촌 형이 하나 딱 있는데 식자植字 돌림으로 이름이 효식이다.
옛날에는 몰라도 지금 와서는 결코 자손들이 많다고는 볼
수가 없겠다.  
  
온누리성결교회 백경종 목사님 내외분, 문만석 장로님 내외분과
아들의 교회동료 부부들이 찾아와 기도와 축하를 해주어서 고마운
마음을 여기 적는다.

모든 영광과 감사는 하나님께!

                                                 <2005. 7. 12>



                                                            


  
*선식이 출생시
  몸무게는 6.13 파운드,
  신장은 19.4 인치였다.



    ⊙ 발표일자 : 2005년07월   ⊙ 작품장르 : 시와함께하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