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하루

by 이월란 posted Sep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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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하루


이월란 (2015-9)

 

초 단위로 만들어진 시계 아래서

나는 분 단위로 태어났다

더듬이 끝에는 눈이 있다

더듬이를 휘저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수 만 개의 길

가장 낮은 길을 가장 느리게 간다

밤이나 비가 오는 낮이면 출몰하는

껍데기를 등에 진 채 시간을 뜯어 먹는다

끈적한 점액이 흘러나올 때마다

땅가루들이 나를 붙들고 일어선다

쫀쫀한 젤리처럼 늘어진 길

마스크 팩처럼 지나온 흔적이 나의 얼굴이다

잔디 깎기 모터에 휩쓸려간

친구들의 살신성인을 밟으며 간다

나를 먹으면 사람들은 소갈증이 없어진단다

꿈에 내가 기어가면 기다리던 일도 이루어진단다

기다림이든, 느림의 미학이든, 인내심이든,

따박 따박 끌고 가는 하루가 밤마다 출몰 한다

스프링클러의 가짜비가 내릴 때마다

집을 등에 지고 아침을 뜯으러 나간다

집은 나가고 들어오는 것보다

차라리 대출 없이 이렇게 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시속 12m의 속도를 넘어서면

아득한 평화가 보인다

이길 필요 없는 경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다만, 지금 여기 길 하나가 태어나고 있고

돌아보면 끈적하게 반짝이는

자국이 막 떠오른 햇살로 지워지고 있다는 것

나는, 다시,

슬로우 모션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