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그리스 여행기/정용진 시인

2015.10.04 04:07

정용진 조회 수:323

터키, 그리스 여행기

정용진 시인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벗어나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가는 물결같이 유유자적하게 방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간 나는 하와이 일주를 시작으로 칸쿤, 알라스카 일주, 캐나다 일주, 동서 유럽 10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태리. 로마 교황청)과 북유럽의 5개국 (소련. 핀랜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을 여행 하였고, 저지난해에는 중국을 일주 하였다.

그리고 고국 남북한을 고루 여행하고 그 여행기도 쓴 터다. 또한 이번에는 오랜 기간 계획하고 벼르던 터키. 그리스 여행을 2015921일부터 101일까지 1011일에 걸쳐 아내와 함께 즐겁게 다녀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평생에 걸쳐 복음을 전하고 전국에 그의 행적과 숨결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는 터키와, 철학의 원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났고, 민주주의의 발상지요 올림픽의 진원지인 그리스의 여행기를 쓰겠다고 필을 든 것이 너무 경망스러운 짓이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하나 아무리 짧은 기간 동안의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의 여행이라도 선배들의 깊은 고증을 자료를 참고삼고, 또 나의 여행 경륜을 더하여 참신하게 기록해 보려고 한다.

본시 여행이란 시정(詩情)과 낭만으로, 세사에 지친 육신과 영혼을 달래주고 말끔히 씻어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여행을 떠난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지 터키는 성지 여행이요, 그리스 여행은 철학과의 만남이며, 올림픽 발상지와의 첫 대면이다.

아내와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21일 저녁 620분 터키항공으로 12시간 비행하여 터키수도 이스탄불(Istanbl)에 도착하니 미국. 시카코. 캐나다. 토론토. 등 다섯 곳에서 여섯 부부 12명이 함께 참여하였다.

이스탄불은 현재 터키의 수도이다. 터키 서부에 있고 마르마라해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다. 역사, 상업적인 중심지는 유럽 지구에 있으며 인구의 1/3은 아시아 지구에 거주한다. 이스탄불은 유럽중동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때까지 수도로 존속하다가 현재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1923년 이후로는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가 되었다. 2014년의 인구수는 14,377,019명이다. 이스탄불은 2010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고, 2012년 유럽의 스포츠 수도로 지정되었다. 1985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사라이부르누(Sarayburnu)기원전 667경에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래로, 이스탄불은 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이스탄불은 거의 1600년 동안 여러 국가의 수도였다. 로마 제국비잔틴 제국(330~1204, 1261~1453)였고, 잠시 라틴 제국(1204~1261)의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1453~ 1922)이 이스탄불로 명칭을 변경하고 수도로 정했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 모습

그 후 우리 일행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성 소피아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은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고대: 하기아 소피아, 현대: 아야 소피아. 라틴어: Sancta Sophia 상크타 소피아. 터키어: Ayasofya 아야소프야.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터키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5371453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됐다. 1453 529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비록, 겉보기에는 유대교의 것으로만 보이기도 하지만, 현대식으로 보자면 이슬람교와 관련이 크다. 실제로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 불린다.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교회는 360, 이스탄불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을 때, 콘스탄티누스 1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정교회 대성당이 이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는지, 훗날의 재건 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명명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최초의 정교회 대성당은 목조 지붕을 가진 바실리크였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는 그 위치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404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성 크리스소톰)를 추방시키는데 수반된 난동으로 교회가 소실되어, 테오도시우스 2에 의해 재건,415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도 현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바실리카이며, 현재에도 일렬의 원주와 주기, 장식된 대들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정교회 대성당도 532 1 13-14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났던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나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다시 소실해 버린다.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는 즉위 후 소피아 정교회 성당의 재건을 결정하여, 그 설계를 안테미오스이시도로스에게 맡겼다. 공사는 511개월이라고 하는 단기간에 종료되어, 537 1227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맞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메나스 총대주교에 의한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여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에 의해서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소재지로서 동방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사당으로서 이용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으며 노아의 방주의 문이나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테이블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는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의 모습

1453 529,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거한(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 제국술탄 메흐메드 2,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이콘)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첨탑)이 증축되어 교회 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아야 소피아 자미로 불리게 된 이 정교회 대성당은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히포드롬 광장 술탄아흐메드 사원 바로 앞에 있는 광장으로 로마시대 대경기장 유적이다. 서기 203년 이곳에서 마차경주가 최초로 열렸다고 하며 당시에는 세계의 각 지역에서 가져온 기둥, 조각상, 오벨리스크 등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제국의 화려함은 이루다 열거할 수가 없어 소피아 대성당 부근의 톱카프( TopKap) 궁전에는 1478년부터 4백년동안 오스만 투르크 궁전으로 사용 되었으며, 수많은 보석들이 진열 되어 있는데 보석관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86캐럿의 다이어몬드가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고 각종 진주와 모세의 지팡이가 진열되어 있다.

현재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변신한 히포드롬 광장에서는 유서 깊은 기둥 3개를 볼 수 있는데 479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들여온 뱀 머리의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 이집트에서 실어 온 이집트 오벨리스크이다. 히포드롬 광장은 오스만 투르크가 이스탄불을 점령해 수도로 삼으면서, 전차 경주에 관심이 없었던 그들로 인해 버려지게 되었다. 로마시대의 훌륭한 건축물 히포드롬의 건축 자재들을 해체해 기둥과 바닥의 벽돌 등을 블루 모스크를 짓는데 사용했다.

히포드롬 광장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니카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폭도들을 진압하고 처형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고, 오스만 시대에는 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가 몰살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황후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

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하고 처형했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근위병, 친위대로 결혼과 재산축적등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기독교국가의 소년들을 개종시키고 교육시켜서 죽음도 불사하는 이슬람의 전사로 만들었다.

술탄 근처에 있다 보니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여 나중에 해산되었고, 해산에 저항하다가 히포드럼에서 몰살되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카 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2( 337-361 재위) 357년에 알렉산드리아로 오벨리스크를 옮겼으며,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천 마리나 되는 양들을 잡아서 내장을 빼낸 후 그 속에 바람을 불어 넣어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싣고 왔다. 이집트 오벨리스크에는,500년 전의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비잔틴 양식의 받침대 위에 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본래 하단부를 포함해 30m였으나 일부가 파손되어 현재는 25.6m이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는 각각 투트모스 세가 B.C.1450에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기리는 내용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광장 북쪽에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경기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오벨리스크 건립에 관한 비문도 쓰여있다. 경마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뿐 아니라 그 당시의 전차 경기를 관람하는 귀족들의 모습과 경기와 관련된 내용들이 부조되어 있고, 귀족들의 치적들이 새겨져 있다.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터에는 네 개의 오벨리스크가 있었는데 이 곳에 하나, 그리고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퐁피두 광장에 하나씩 있으며 정작 이집트에는 미완성의 오벨리스크 하나만 있다고 한다. 광장 한가운데는 큰 뱀들이 서로 엉켜 있는 청동 기둥이 서 있다. 원래는 뱀 세마리가 서로 뒤엉켜 황금그릇을 받치는 모양이었는데 현재는 상당부분 파손되어 몸통만 남아있는 상태다. 뱀 기둥은 479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영화 300에 나왔던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와 그리스 전에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인을 무찌른 기념으로 그리스인들이 제작한 전승기념비다.

 

 

 

 청동뱀 기둥

 

3마리 뱀 모양의 청동 기둥으로 기둥 꼭대기에 3개의 뱀 머리와 황금그릇이 있었지만 4차 십자군원정 때의 약탈로 황금그릇이 없어졌고, 그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정복 후 3개의 머리도 차례대로 사라졌는데, 현재 2개는 각각  박물관에 있고 한개는 아직 못 찾았다고 한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는 높이는 32m이며, 거칠게 깎은 벽돌 모양의 돌을 쌓아 올려 세운 것이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 4세기 경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869년에 지진으로 꼭대기가 일부 무너진 뒤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보수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누스 7세의 조부인 바실 1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황금빛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청동 장식은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인 1204년에 십자군들이 동전을 만들기 위해 가져가면서 유실되어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히포드롬 광장은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비잔틴제국의중요한 국가행사가 히포드롬에서 개최되었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

 

광장 북쪽 끝에는 독일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이스탄불을 방문한 뒤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일에서 제작하여 오리엔탈 특급 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하여 선물한 분수대가 있다. 분수는 전반적으로 신 비잔틴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8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진 8각형 망루 형태를 하고 있다. 각각의 모서리에는 독일과 오스만투르크 간의 동맹을 상징하고자 양국 지도자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석조 장식이 달려있다. 정에는 내부를 금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모자이크로 장식한 돔이 덮여있다. 돔 외부는 본래 청동 원반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석 원반은 도난당한 상태이다. 은은한 조명이 블루모스크를 아름답게 감싸고 있다.

 

 

 

 블루 모스크 야경

 

 

터키 공화국의 오늘

1923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하지만 2013 1113에 아른츠 부총리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다시 바뀌기를 원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그 후 우리 일행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보스프러스 해협을 유람선으로 관광하고, 오스만 트르크 황제들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톱프카 궁전. 압도적인 규모의로 그리스 정교와 이스람 문화의 미를 함께 갖춘 성 소피아 성당을 찾아보고 푸른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불르모스크 그리고 로마시대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럼 광장을 둘러보고 카파토키아로 이동 하였다.

여행 3일째 되는 날에는 카파토키아를 찾았는데 이곳은 터어키의 중부지방. 아나톨리아 고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세계 7대 자연경관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누구나가 보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특히 열기구 여행이 유명하여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는 곳으로 우리 내외도 호기로운 마음으로 평생 처음으로 열기구 풍선( Kapadokya Bballons)에 올라 사막 풍경에 흠뻑졎어 보았다.

풍선은 20여명이 함께 타서 조정사가 조정하는데 대부분 바람을 이용하고 위로 올릴 때에는 가스 불을 피워서 올린다. 너무나 흥미로운 광경 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시로 읊었다.

 

카파도키야 사막 풍선 모습

 

 

터키 카파도기야 사막에서

(Kapadokya Balloons)

정용진 시인

터키(Turki)

카파도기야 사막에서

내 인생을 풍선에 띄운다.

일망무제(一望無際) 허허벌판

발아래는

기암괴석(奇巖怪石)

만학천봉(萬壑千峰)

하늘을 향해

봉긋봉긋 솟아있고

끝없이 푸른 하늘에

나를 띄운다.

 

오르다가

힘에 지쳐 하강할 때는

가스 불을 피워

밀어 올리고

나의 인생 이란

본시

구름으로 피었다가

구름으로 지는 것

(生 卽 浮雲來 浮雲 去)

 

낮에는

구름으로 떠돌고

밤에는 별빛으로 빛난다.

 

, !

인생의 오묘함이여

풍선위에 떠서 바라다보는

호기로움이여.

 

내 인생의 남은 여정을

물결처럼 굽이치고

구름처럼 떠돌리라

바람처럼 흐르리라.

 

이곳에는 숱한 곳에 바위를 파서 고대교회로 사용했던 괴레메 야외 박물관과 기독교 박해를 피해 지하에 건설 되었던 인구 2만명이 살았다는 데린쿠유 지하도시가 장관이고 버섯 모양으로 선 파사계곡의 요정의 굴뚝이 흥미롭다.

이 고장에서는 터키에서 전통적으로 즐겨 먹는 화덕에 오랫동안 구워서 먹는 항아리 케밥이 유명하다하여 점심으로 맛보았다. 터키 음식은 우리 한식의 개운함에 비하여 너무 텁텁하고 향신료를 많이 넣어 비위가 상하는 것이 큰 흠이었다.

5일에는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되었다는 휴양도시 안탈야 관광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한 곳으로 버가 교회를 방문하고 지중해 공원 카라알라리오웁루 공원과 안탈리아의 상징인 아블이미나레를 본 후 안탈리아 크르즈를 탔다.

6일째 되는 날에는 라오디케이아로 이동하여 목화의 성이라 불리우는 파묵칼레오 옮겨가서 성스러운 도시라는 의미의 히에라 폴리스의 고대 유적들을 관람하고, 석회석을 뚫고 용솟음치는 석회진흙을 온몸에 바르면서 그동안 싸인 피로를 말끔히 풀고 온천욕을 즐겼다.

그 후 에페소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물 셀스수 도서관을 둘러보고 2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원형극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계속하여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메두사의 부조로 유명한 황제를 위하여 건설 되었다는 하드리아누스 신전 에페소 성모마리아 성당. 사도 요한의 무덤 터. 아르테미스 신전을 관광하였다.

그리고 에게해의 휴양도시 차낙칼에에서 여정을 풀었다. 이 고장을 여행하다보면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목욕탕과 석조 수세식 변소들을 보게 되는데 과거 로마인들은 목욕을 즐겨서 무병장수를 누렸다 하기도하고, 질병에 강했다하며 또 종래는 목욕문화로 망했다고도 한다.

8일에는 세계2차 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다르다스 해협을 페리로 이동하여 터키와 그리스 국경 입살라/기띠를 버스로 통과하였다.

그리고 빌립보 유적지요 순례지인 루디아 세레터 지진 때 착고가 풀렸다는 사도 바울의 감옥을 둘러보면서 감회가 무량 하였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이야기하다 보면 루디아를 빼놓을 수가 없다 루디아는 빌립보의 시장에서 자줏빛 옷감을 팔던 여인이었다. 여인네 몸으로 생업의 일선에 뛰어든 것을 보면 루디아는 집안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루디아는 빌립보 시장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옷감을 팔고 있었다. 그럴 즈음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고 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로서는 가슴 설레는 첫 유럽 전도여행이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 관문이자 가장 큰 성인 빌립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설교할 장소를 찾아 그곳의 강변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강변에 모여 있던 한 무리의 여인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그 중에 루디아가 끼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로 위대한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과 빌립보의 자줏빛 옷감 장수인 루디아의 만남이었다. 사도 바울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접한 루디아는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유럽 땅 빌립보에 공식적으로 첫 교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님의 교회를 위한 루디아의 헌신과 봉사가 그 찬란한 빛을 발한다. 먼저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한다. 그래서 루디아는 사도 바울과 함께 유럽 땅 마케도니아에 주님의 첫 번째 교회를 세우게 된다. 말하자면 루디아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발판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디아는 매일의 수고에 지친 주의 종 사도 바울을 정성껏 대접한다. 힘들고 어려운 생계였지만 루디아는 열심히 옷감을 팔아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위하고 주의 종을 위하였다. 루디아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저 시장 바닥에서 옷감을 파는 영세 상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많은 한계를 가진 연약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의 작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때 모든 것이 위대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유럽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위대한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오늘 그대여, 자신의 존재가 보잘 것 없고 가진 것이나 내세울 것이 없는가? 루디아를 보라. 그리고 그 길을 따라라. 자신의 존재가 어떠하든, 가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다면 그것은 주님의 손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인간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려면 반드시 하늘이 보낸 귀한 동행자를 만난다. 사도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강성한 로마인들의 갖은 박해와 핍박 속에서 신음하고 방화하던 사도 바울이 이제 하나님의 섭리로 천인만마를 얻은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전도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나. 이는 분명한 천우신조다.

9일째 되는 날 메테오라로 이동하여 기암괴석과 절벽위에 세워진 수도원과 수녀원들을 관광하고 이들이 얼마나 신앙심이 깊고 강했으면 이 위험하고 높은 곳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세웠을까 마음속으로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그 후 다시 6시간을 운행하여 아테네에 도착 하였다.

사보 바울의 전도여행지 터키를 우리 일행은 성지순례로 끝내고 이제 소크라테스. 풀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원조들이 태어나 인류역사에 철학을 탄생시킨 원 고장, 세계 최초로 민주주의를 시행한 선진국, 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탄생시킨 그리스를 찾았다.

고대도시 아테네(그리스어: Αθήνα 아티나[*])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며, 아티키 주의 중심 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도시이며, 그 역사는 3,400년에 이른다. 고대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으며, 고대 아테네의 부는 피레아스 항구를 통해서 유입됐다.

아테네 행정 구역내 인구는 664,046(2011)이며, 면적은 39 평방 킬로미터이다.[2] 아테네의 도시 경계 바깥을 아우른 도시권 전체 인구는 3,130,841 (2001)이며,[1] 면적은 412 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 유럽연합 통계국에 따르면, 아테네 대도시권역(LUZ, Larger Urban Zone)유럽 연합 내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다고 한다.(3,753,783, 2011) 혼잡한 국제 대도시인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 금융, 산업,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세계 도시 중 알파-급 도시로 등재되어 있다. 이 도시는 유럽 연합의 주요 사업 중심지로 급속히 거듭나고 있다. UBS의 어느 구에서 2008년 아테네는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에서 32위로 부유한 도시이며, 25위로 물가가 비싼 도시로 선정되었다.

고전기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지였던 플라톤아카데메이아아리스토텔레스뤼케이온도 아테네에 있었다.[7][8] 이 도시는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 고대 세계의 쟁쟁한 위인들을 배출하였다. 또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쳐,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강대한 힘을 얻어 이웃 나라들을 2천년이나 지배한 강대국 이었으나, 그리스는 이웃 국가들의 숱한 침략을 받았고 고통을 받은 나라로서 마치 우리나라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터키는 6.25 동란 때15천명의 군인들을 우리나라에 파병하여 도왔고 수많은 장병들이 전사 했으며 아직도 6백여명의 전몰유해가 한국에 묻혀 있다는데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도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의 우방국가다.

이들의 주식은 밀이었으며 도로변에 오렌지 밭. 목화밭의 광대한 초원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 또한 6.25 참전국이고 우리의 아름다운 우방으로 역시 주식은 밀이고 터키와는 달리 음식들이 순하고 향료를 별로 넣지 아니하여 입에 맞았다. 이 나라 역시 평야가 넓고 토양이 기름져 보였다.

그리고 터키는 양질의 가죽제품 생산양이 많아 주로 이태리. 프랑스 등에 원단을 수출하고 그중 양 가죽 제품은 질이 아주 뛰어나다.

 

 

아테네 그리스 신전

 

터키에서는 유명한 가죽 제품들이 생산 되는데 이 제품 판매장에는 이 제품을 선전하기 위하여 제품 판매장에는 늘씬한 모델들이 가죽코트를 입고 고객들을 향해 팻션쇼를 하는데 고객 중 내 아내가 일일 모델로 뽑혀 모델 노릇을 하여 일행들의 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리스는 올리브(감람나무)의 주산단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그 기름은 인체에 좋아 식용유로 그리고 바디 보호용으로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 10일에는 고린도 지방의 유적지인 6킬로미터가 넘는 네로황제가 팠다는 고린도 운하를 넘어 사도 바울의 비마터. 피레네 우물. 등을 둘러보고 근대 올림 경기장의 원조인 산타마크 광장을 찾았고, 세계문화 유산이1호인 파르테논 신전을 관람하였다.

희랍에는 곳곳에 아고라(Aora. 광장)이 많은데 철인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젊 이들을 향하여 너 자신을 알라. 외치고  스스로 무지(無知)의 지()를 깨달으라고 연설한 곳이다.

 

그 후 잘 정돈된 아테네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이는 그리스 아테네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이다. 2007326일 아크로폴리스는 유럽 건축물 문화유산 목록에서 중요 기념물로 공식 지정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서 해발 156m 높이에 꼭대기가 평평한 바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면적은 약 3 헥타르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입구에는 프로필라이아(Propylaea)라는 기념문이 있다. 입구 남쪽에는 작은 아테나 니케 신전이 있다. 원래 페이디아스가 제작한 아테나 여신 동상이 이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아크로폴리스 중심에는 파르테논 신전(아테나 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 신전)이 있다. 입구 동쪽과 파르테논 북쪽에는 에렉테이온이란 신전이 있다. 대지(臺地)의 남쪽은 아크로폴리스의 꼭대기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야외극장인 디오니소스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는 현재 부분적으로 복원된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 있다. 대부분의 귀중한 고대 유물은 언덕의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71014400m 떨어진 곳에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으로 고대 유물을 이전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6주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니케 신전 터도 보았다.

과거 그리스는 웬 신들은 그리 많고 신전들은 숱하게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칼 한 것은 그리스는 정교도 국가인데 비하여 사도 바울이 그렇게 목숨을 다해 전도를 행한 터키는 개신교회나 캐돌릭 교회가 한곳도 없는 회교 국가로 전락하여 회교당 첨탑만 즐비하다. 그들은 하루에 4번 알라신을 향하여 절을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도적질을 하면 잡아다가 손을 자른다니 범죄가 거의 없고 교회당에도 헌금 제도는 없고 자기보다 가난한자나 어려운 단체들을 스스로 도와주는 율법이 있다고 한다.

이스람교도들의 성지 순례는 하즈라고하며 종교적 의례 참가의 큰 의무에 하나다. 이들은 9월 달 라마단에는 금식한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해산물은 비늘이 없는 생선은 먹을 수 없으며 채소와 농산물은 모두 허용. 고기는 상체만 먹고 하체는 못 먹고 구분 영역이 생기는 부분은 오직 날짐승과 들짐승 고기로, 무슬림이 이슬람식으로 잡은 고기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 즉 돼지를 제외한 소, , , 염소의 고기라도 이슬람 도축법에 의해 도축되지 않았을 경우 돼지고기랑 똑같이 금지사항이라고 한다.

왜 의인과 성인들은 늘 감옥을 드나들어야 되는지 터키에서는 사도 바울의 감옥을 보았는데 그리스에서는 철인 소크라테스의 감옥을 보았다.

 

너 자신을 알라

정용진 시인

 

나는

희랍의 등에다.

아고라(Agora) 에서

젊은이들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기 위하여

너희들의 등에 따끔하게 침을 놓겠다.

철인(哲人) 소크라테스의 경고다.

 

선생님은 죄도 없으신데

왜 감옥에 갇히셨어요.

나는 신의 소리를 듣고

젊은이들에게

무지의 지(無知)의 지()

자각케 선동한 죄다.

 

이제

나는 독배(Hemlock)를 마시고

저 세상으로 떠난다.

악법(惡法)도 법이다.

준수하여라.

 

젊은이들이여

부디

너 자신을 알라.

 

*등에...쇠파리 *Agora...광장.

*Daimonion...신의 소리. 양심의 소리.   

그 후 필로파포스 언덕을 지나 각자 자기들의 집으로 헤어져 돌아왔다.

우리 내외가 터키, 그리스 여행을 한다니까 위험한 지역이라고 심히 염려들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사실 그곳에 가 보니 대단히 안전한 곳이라고 한국에서는 우리 동포들이 2백여 안내소를 통해 연 6만명이상이 성지순례 여행을 온다고 한다. 우리가 여행 할 때에도 여러 곳에서 여행 온 동포들을 만나서 대단히 반가웠다.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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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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