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는 나의 자매들 모두 빌딩 상자 속에 둥지를 틀고 산다. 고층에 사는 막내 여동생 집 거실 유리창 밖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멀미가 인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과 바람에 나부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노란 은행잎이 얼마나 화사하고 화려한지. 한국 가을이 이리 아름다웠나? 감탄이 절로 터진다.
한국은 사람도 환경도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 것 같다. 특별한 모임 외에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다니는 나와 달리 싹 빼고 다니는 멋쟁이가 참 많다. 백화점이든 은행이든 동네 커피숍이든 연령층이 다양한 미국에 비해 대부분의 직원들이 젊고 예쁘고 매너도 좋다. 하지만 개인 매너는 좀 아닌 것 같다. 마켓 갔다가 문을 열고 동생을 기다리는데 정장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열어 논 문으로 쏙 빠져나간다. '익스큐즈미' 아니 '고맙다' 말도 안하고 뭐야, 속으로 구시렁대며 미국서 온 티 좀 내고 있다.
건강보험 제도, 쓰레기 분리수거 등 한국이 특별히 잘 하고 있는 것이 많지만, 지하철 시스템은 정말 최고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는 내가 승차권을 사서 지하철 노선을 몇 번씩 갈아타며 지인들을 만나러 다닌다.
버스 타면 시간이 절약된다고 해서 강남 지하철역 앞에서 수원 가는 버스를 탔다. 얼마예요? 물었더니 2500원 이란다. 5000원짜린데 어쩌죠? 했더니 나를 멀뚱히 쳐다 보던 기사 아저씨가 내릴 때 내란다. 일단 우아한 한 부인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 입구에 있는 기계에 카드를 대니까 '환승입니다' 낭랑한 음성이 응답을 한다. 돈 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걱정이 돼 옆 부인한테 돈 좀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없네요' 하며 모호한 웃음을 짓는다. 그때 '안전 벨트를 매라' 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아참, 하며 얼른 안전 벨트를 찾아 맸다. 방송이 두 번 더 나왔지만 승객들이 꿈쩍도 않는다. 옆 부인도 안 매길래 '안 매는 거예요?' 물었더니 '매야죠.' 말만하고 또 빙긋이 웃는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 '촌에서 왔더니 참말로 어렵네' 중얼댔더니 '아, 촌에서 왔구나' 하며 또 웃는다.
내릴 때쯤 기사 아저씨한테 다가가 '5000원 짜린데 어쩌죠?' 했더니 '이 버스 오늘로 그만 타는 거 아니죠?' 라며 웃는다. '네' 라는 답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말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나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공짜 버스를 탔다.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 의 역사가 짧지 않음에도 수도권 버스는 타 본적이 없어서 몰랐다는 우리 자매들, '고생했네' 로 미안함을 대신한다.
한국 올 때면 설렘과 기대도 크지만, 한국의 변화와 한국말의 진의를 따라잡지 못해 어리벙벙한 촌놈이 되고 마는 일이 생길까 봐 사실 좀 긴장한다. 미국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반기는 사람은 줄어들고, '추억은 힘이 없다'는 어느 드라마 속 대사를 실감하며 아픔도 느낀다. 그럼에도 그리움이 너무 많아 늙고 낡아가는, 그래서 더 정겹고 푸근한 오랜 것들을 찾아 나는 또 한국에 온다. 세월 갈수록 단풍은 더 곱게 물들어 가고.
미주중앙일보 < 이아침에> 2015.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