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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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가구의 힘 /박형준

2008.03.27 08:37

정문선 조회 수:149 추천:23

가구의 힘 - 박 형 준 -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 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나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1991)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성찰적, 관조적, 냉소적, ◆ 표현 :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여 양심에 가책을 받음. *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 빈 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 마디 해 주었다. → 외삼촌에 대한 화자의 비판적 태도가 냉소적 어조를 낳게 함. *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 지적인 존재로 보이려는 외삼촌의 허위의식을 지적함. 물건의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가격과 동일한 개념)를 추구함을 보여줌. * 상심한 가슴을 덮일 때가 있는 법이다 → '추억의 힘'을 지닌 가구의 치유적 기능에 주목하고 있음. *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 이해할 것 → 시적 화자의 가구론 * 그런 맥락 → 낡은 가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지난날의 삶의 기억(추억)이 아픈 마음을 감싸 줌. *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 계속 생각해서 결론을 내고 싶어서 * 서글픈 가구론 →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자신의 처지 때문에 '서글픈'이라고 말함. 화자의 가구론이 화자의 처지에서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합리화하는 듯도 하기 때문에 ◆ 제재 : 낡은 가구 ◆ 주제 : 낡고 오래된 가구의 힘 = 삶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해주는 힘 낡은 가구를 통해 인식하게 되는 추억(기억)의 소중함.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졸부가 된 외삼촌에 대한 거부감 ◆ 2연 : 오래 된 낡은 가구에 대한 몽상(가구 = 추억의 힘) ◆ 3연 : '나'의 서글픈 가구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오래 되고 낡은 가구에 대한 몽상을 통해 현실적 무능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물질과 정신을 대립시키며, 오래된 가구가 가지는 추억과 기억의 힘을 노래한다. 그 가구의 힘으로 우리는 삶의 고통과 힘겨움을 치유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심사평] 박형준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준다는 건 우선 마음 놓이는 일이다. '가구의 힘'은 우리의 살림살이가 사람다운 살림살이이기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구심적인 힘에 대한 한 성찰이다. 가구를 통해서 얘기되는 그 성찰은 졸부의 새로 산 가구들을 혐오하면서 낡았지만 세월의 때와 생활의 상처와 따라서 인간적 숨결의 명암이 배어 있는 가구를 칭송한다. 작자는 그것을 '추억의 힘'이라고 부른다. 한 집안에서부터 민족 단위에 이르기까지 공동체가 공유하는 추억은 사실 그 구성원의 삶의 자기 동일성, 역사성과 품위를 뒷받침하는 물증이요 후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자동화된 움직임 속에서 늘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오늘의 삶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상품의 물신화와 그에 따르는 마음의 황폐화를 생각하면 가난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아주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가구의 힘'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감정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사 위원 : 김남조, 신경림,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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