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오늘:
1
어제:
3
전체:
10,707

이달의 작가

귀뚜라미/황동규

2008.03.28 08:06

정문선 조회 수:150 추천:22

귀뚜라미 - 황동규 -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꼍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 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상징적, 상상적 ◆ 표현 :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주변인의 시각으로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그림. 재미있는 상상을 바탕으로 귀뚜라미 눈에 비친 현대인의 삶을 형상화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다소 힘없이 → 부정적인 상황에 처했음을 짐작케 함. *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 외롭고 고독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배경 * 아무도 없는 낮 시간 →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홀로 지내는 고독한 존재임을 나타냄. * 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 호기심을 느낌. * 집 안에 사는 생물 → 귀뚜라미의 입장에서 본 이 집안의 식구들 * 아 눈이 어두워졌다! → 강한 자극에 의한 충격 또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과 한계 인식 *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 → 쓸슬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 *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 존재(귀뚜라미)의 부재, 독자의 상상을 유도함. ◆ 제재 : 귀뚜라미(집안에서 소외된 존재로, 식구들의 외면을 당하는 쓸쓸한 사람(노인)) ◆ 주제 : 귀뚜라미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대인의 삶(소외된 존재의 시선으로 본 현대 문명)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다용도실로 옮긴 귀뚜라미에 대한 궁금증 ◆ 2연 : 귀뚜라미의 행동에 대한 상상 ◆ 3연 : 귀뚜라미의 부재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귀뚜라미가 베란다에서 다용도실로 이동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귀뚜라미의 눈에 비친 인간의 문명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들리던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다용도실에서 들리게 된 것을 의아해하다가 귀뚜라미의 이동 과정을 상상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주변을 살피고 한숨 자기도 하고, 음식 자국을 핥아 보는 귀뚜라미의 모습은 식구들이 모두 집을 나간 후 혼자 남겨진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는 노인일 수도 있고,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귀뚜라미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생활상과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귀뚜라미는 첫째, 노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 식구들에게 소외된 노인의 일상 생활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텔레비전도 식구들과 함께 편히 보지 못하고, 이미 눈이 어두워졌을 정도로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에서 외롭게 지내야 하는 모습은 도시 노인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밖에 나간 낮 시간이 되어서야 집 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다 소리조차 사라져 가는 모습은 소외된 노인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둘째, 아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 낯선 곳(도시)에 오게 된 아이가 낯선 사물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분 근처에서 거실로 이동한 것을 시골에서 도시로의 이동으로 본다면, 도시의 모든 것에 낯설어하며 적응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귀뚜라미처럼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아이의 모습에서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