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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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그 여름의 끝/이성복

2008.03.29 13:47

정문선 조회 수:251 추천:23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그 여름의 끝, 문학과 지성사>(1990)- 해 설 [개관 정리] ◆ 특성 고백적 어조 산문적 율격 자연물과 화자를 대응시키며 시상을 전개함. 종결어미를 반복 사용하여 형식적 통일미를 형성함. 강렬한 시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드러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그 여름 → 시련의 시간, 절망의 시간 * 백일홍 → 화자인 '나'와 대응되는 관계 * 폭풍 → 시련이나 고난을 상징 *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 고난과 시련을 극복한 뒤에 강렬하게 피어나는 생명력을 '쏟아지는 우박'에 비유함. * 붉은 꽃들 → 생명력의 발산, 강렬한 색채 이미지의 사용 *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고통, 상처)을 매달았지만 → 화자는 백일홍의 '붉은 꽃'을 보고 자신이 처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다. * 억센 꽃들 → 질기고 강한 생명력 * 피 → 분출된 생명력 *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백일홍의 생명력을 보며 절망을 극복함. ◆ 주제 : 자연의 생명력을 통한 시련의 극복 작품 속의 '나'와 '백일홍' 폭풍을 이겨 내고 여름을 무사히 난 백일홍은, 곧 절망의 먼 길을 돌아온 시적 화자의 다른 모습이다. 화자 역시 폭풍 같은 삶의 시련에 처하였었지만 절망에서 빠져 나와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둘째 연은 시적 화자의 진술인 동시에 백일홍의 진술로도 읽힌다. 마지막 연의 '여름의 끝'은 절망의 끝, 절망과의 싸움의 마감이며 주체적 열기 분출을 통해 절망적 상황을 견뎌 낸 승리의 순간이다.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시련을 극복한 뒤의 생명력 발현(자연) ◆ 2연 : 시련을 극복한 뒤의 생명력 발현(시적 화자) ◆ 3연 : 자연의 생명력을 통한 시련의 극복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서 백일홍은 '자연'을 대표하는 제재이다. 자연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현실과 대조되어 생명력과 희망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화자는 백일홍의 모습을 통해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고 극복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긍정을 회복한다. 이 시는 시인 이성복이 한 시절 보여준 참담한 자기 모색의 도정에서 의미있는 결절로 읽힌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앞선 많은 시편들을 참고하여 읽으면 이 시의 자리가 꽤 긴 곡조의 한 끝에 있음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폭풍을 이겨내고 여름을 무사히 난 백일홍은, 절망의 먼 길을 돌아온 시의 화자의 다른 모습이다. 화자 또한 폭풍 속에 서 있었으니, 구체적으로 '폭풍'에 비유된 삶의 시련은 그를 궁극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그 역시 어려움 속에서도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던 것이다. 두 번째 연은 시적 화자의 진술이면서, 동시에 백일홍의 진술로도 읽힌다. 끝 연의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것은 여름 석 달 동안 계속 꽃 피는, 정확하게는 수많은 꽃망울들이 번갈아 피어 결국 한 계절을 온전히 감당하는 꽃인 백일홍의 생태이다. 이렇게 화려한 절망, 또는 절망과의 싸움이 마감하는 곳은 여름의 끝이면서 절망의 끝이다. 또한 그것은 주체적 열기를 분출하며 절망의 상황을 견디어 낸 승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낙화는 '피'의 형상을 띤다. 깨달음이란 고통 없이 순순히 오지 않는 법이다. 승리로 귀결되는 절망의 끝, 여름의 끝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그 대가로 일정한 출혈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오랜 절망의 끝에서 시인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의 연습일 것이다. - 이희중, <한국의 현대시> 이성복의 산문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 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두루 통해 있는 성인(聖人)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벽(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성인의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대대(對待)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노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지껏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생각되었던 슬픔은 한 장의 덮개 그림처럼 떨어져내렸다. 벽도, 덮개 그림도 허깨비일 뿐이며, 그것들이 비록 양파 껍질처럼 거죽이면서 동시에 속이 된다 할지라도 허깨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허깨비가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