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오늘:
2
어제:
1
전체:
10,709

이달의 작가

길/김기림

2008.03.29 13:51

정문선 조회 수:93 추천:17

길 - 김기림 -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 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조광>(1936)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애상적, 회고적 ◆ 표현 : 산문적인 호흡과 회상적 어조, 성장소설과 같은 정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 공간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시상이 전개됨. → 길(과거, 상실감과 고통) - 강가( 〃 ) - 버드나무 밑(현재, 회상과 그리움)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1연 → 소년 시절(시간), 언덕길(공간), 어머니의 상여(사건) * 2연 → 첫사랑의 대상이 '어머니'일 가능성이 많음. * 3연 → 상실감으로 인해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 색채 효과가 두드러짐 * 봄이, 여름이 ~ 다녀갔다. → 오랜 세월의 흐름 * 모래둔 → 모래 둔덕(언덕) * 어두운 내 마음 → 상실감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 * 항용 → 드물지 않게, 늘, 항상 * 감기 → 통과의례에 해당함(인간이 성장하면서 겪어야 하는 아픔을 상징적으로 제시해 줌). * 버드나무 →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대상 *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 → 화자가 잃어 버린 것들(상실감의 원인들) *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어두워질 때까지 울고 있다가, 어둠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감추는 모습(활유법) * 어둠 → 부정적인 대상이기도 하지만, 상실감과 기다림에 지친 화자를 위로해 주는 대상이기도 함. ◆ 제재 : 길, 여읨 ◆ 주제 : 길 위에서 여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상, 상실감으로 인한 고통과 애상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과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어머니를 여의었던 소년 시절(과거 회상) ◆ 2연 : 첫사랑을 잃어버림(과거 회상) ◆ 3연 : 상실감으로 인한 방황(과거 회상) ◆ 4연 : 고통으로 보낸 나날들(과거 회상) ◆ 5연 :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움에 젖음.(현재)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이별의 슬픔과 애상을 산문적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제재인 '길'은 '떠나보내는 길'이며, 그 길에서 떠나보낸 어머니, 첫사랑, 잃어 버린 기억들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1연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화자의 소년 시절은 끝나 버렸다고 말한다. 실제 김기림의 어머니 밀양 박씨는 아들이 장성하는 것을 지켜 보지 못하고 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천진난만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 소년에서 슬픔을 인내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죽음) 2연은 어머니의 상여가 아스라이 사라져 가던 그 언덕길에서 첫사랑을 만났다가 바로 그 언덕길 위에서 잃어버렸노라고 말하고 있다. 조약돌처럼 작고 아름답게 시작되었으나, 또한 조약돌처럼 가슴에 단단한 슬픔만을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나 버린 것이다.(이별) 3연에서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 겪은 이러한 상실의 아픔으로 인하여 죽은 어머니와, 잃어 버린 첫사랑의 추억이 서려 있는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 저녁 노을이 물들 무렵이면, 눈물에 젖은 채 쓸쓸하게 돌아오곤 했다고 회고한다. '푸른 하늘 빛'은 동경을, '노을'은 그리움을, 그리고 '자줏빛으로 젖어서'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음을 의미한다.(그리움) 4연의 시적 공간인 '강가'는 바다에서 시작하여 강으로 이어지는 상실의 공간이자, 제재인 '길'의 변형된 이미지이다. 그 상실의 공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여러 번 흘러갔지만, 화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슬픔들을 간직하고 있다. '누런 모래둔(모래 언덕)'은 우울한 화자의 마음의 반영이며, '감기'는 잃어 버린 것들로 인한 '깊은 슬픔'을 형상화한 것이다.(상실감, 슬픔) 5연은 '지금도'라는 어휘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상황이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는 그만큼 화자의 슬픔이 오래되었음을 의미하며,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화자는 지난날을 잊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해가 기울어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뺨의 얼룩'은 화자의 눈물을 의미한다. (기다림과 눈물) 죽음, 이별, 그리움, 상실감(슬픔), 기다림과 눈물 등 슬픈 소재들로 시상은 전개되지만, 공간의 변화(바다→강가→버드나무)와 함께 한 소년의 성장소설과도 같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정조는 아름답고 감미롭기까지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