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문장>(1941)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감각적, 묘사적, 관조적
◆ 표현 : 짧은 행과 규칙적인 연 구분으로 자연스런 휴지(休止)와 여백의 미 조성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추보식 구성)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돌에 / 그늘이 차고 → 비구름이 몰려온 장면
* 따로 몰리는 / 소소리 바람 → 비가 내리기 직전에 바람이 부는 모습
* 앞 섰거니 하여 /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 빗발이 바람에 불리어 날리는 모양에 대한 묘사
* 종종 다리 까칠한 / 산새 걸음걸이 → 빗방울이 여기저기 다투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모습 묘사
* 여울 지어 / 수척한 흰 물살 → 빗물이 여울을 이루어 계곡으로 흘러가는 모습(의인화)
* 갈갈이 / 손가락 펴고 → 계곡의 여울이 일으키는 여러 갈래의 흐름을 의인화한 표현. 얕게 흐르는 계곡 물
* 멎은 듯 / 새삼 듣는 빗낱 → 멎을 듯하다가 다시 오는 비를 생동감 있게 묘사
* 붉은 잎 잎 / 소란히 밟고 간다 →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정경으로, 나뭇잎에 후두둑 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를 선명한 이미지로 묘사함.
◆ 제재 : 비
◆ 주제 : 비 내리는 날의 서경과 서정
[시상의 흐름(짜임)]
◆ 기(1연∼2연) : 비 내리기 직전의 모습
◆ 승(3연∼4연) : 빗방울이 여기저기 다투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모습
◆ 전(5연∼6연) : 빗물이 모여서 여울이 되어 흘러가는 모습
◆ 결(7연∼8연) :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정경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한국 현대시 400선 - 이해와 감상』(양승국 저)에서
이 시는 정지용의 시 가운데서 시어, 사물에 대한 인식, 형식 등에 있어서 가장 정제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자연 현상을 섬세한 묘사로 표현한 이 작품은 정교한 언어로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비 내리는 모습을 감각적 시어의 유기적 결합 방법과 순차적 시간의 질서에 따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어떤 감정 표출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두 8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규칙적으로 두 개의 연이 하나의 단락을 이루어 보두 네 장면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1·2연은 비 내리기 직전, 돌에 그늘이 차고 어지럽게 바람이 부는 모습을, 3·4연은 빗방울이 여기저기 앞다투어 떨어지는 모습을 '종종다리 까칠한 / 산새 걸음걸이'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5·6연은 빗물이 모여 여울 지어 흘러가는 모습을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 손가락 펴고'와 같이 의인화하여 보여 주고 있다. 마치 하얀 뼈마디를 드러낸 것처럼 물보라를 일으키며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는 여울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비가 계속되었음을 알려 주는 동시에, 첫 단락과의 시간의 간극을 짦은 시행과 규칙적인 연 구분으로 자연스럽게 해소하고 있다. 7·8연은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모습을 '붉은 잎 잎 / 소란히 밟고 간다'고 표현함으로써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대로 들려올 것같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