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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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파 냄새 속에서/ 마종하

2008.04.01 09:38

정문선 조회 수:122 추천:18

파 냄새 속에서 - 마종하 - 빈 사과 궤짝을 우리 마을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주워다 흙을 담고 빽빽이 파를 심었다. 눈 오는 날 발가벗은 나무들이 흰 깁을 두르던 날 마누라가 우장산 기슭으로 나를 마구 끌고 가서 흙을 담으라고 해서 담았다. 구제받지 못할 나의 긴긴 잠을 불러 흔들어 깨워서 파를 심으라고 해서 심었다. 시퍼렇게 언 파를 흙에다 끼우면서 나는 은빛 깁의 산이 그립다고 했다. (목숨이야 마음같이 안될지언정, 그 산 속에 한동안 묻혀 있고 싶다고 했다.) 길다란 궤짝에 흙을 담아 왔으면 되었지 검은 흙 가득가득 속살이 하얀 파를 심어 놓았으면 되었지 더 무슨 정신 나간 잠꼬대를 하느냐고 마누라는 치마를 펄럭이며 돌아서 버렸다. 그래 좋다, 푸른 파. 뜯어먹자 매운 파. 콧날이 얼얼한 우리들의 삶. 너무 매워서 눈물 나는 궤짝 속의 삶. -시집 <파 냄새 속에서>(1988)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체념적, 비판적, 상징적 ◆ 표현 : 일상의 경험을 삽화적으로 보여줌. 상징적 소재로 주제를 강조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흙을 담고 빽빽이 / 파를 심었다. → 일상을 벗어난 자연적인 삶에 대한 경험 * 파 → 근원적인 삶에 대한 자각의 매개체 * 흰 깁 → 나무를 덮은 흰 눈 * 우장산 →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곳임. * 흙을 담으라고 해서 담았다. → 수동적인 삶의 자세 * 구제받지 못할 나의 긴긴 잠 →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현실의 안일하고 속박된 생활 * 은빛 깁의 산 →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주는 대상 화자의 현실과 대비되는 공간으로 '자유와 초월의 공간'임. * 더 무슨 정신 나간 잠꼬대를 → 일상을 벗어나기 어려운 현대인의 삶 * 뜯어먹자 매운 파 → 답답한 일상에 대한 역설적 긍정 만족할 수 없는 일상이지만 매운 파처럼 강렬하고 독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임. * 궤짝 속의 삶 → 답답한 일상 ◆ 제재 : 파 냄새 = 일상에 잠들어 있던 시적 화자의 의식을 일깨우는 매개체 시적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에 대해 새삼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체 시적 화자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능을 함. ◆ 주제 : 일상의 한계를 탈출하려는 의지 [시상의 흐름(짜임)] ◆ 1~11행 : 빈 궤짝에 파를 심음. ◆ 12~16행 : 자연과 함께 하고 싶음 ◆ 17~22행 : 아내의 질책과 일상의 한계 ◆ 23~ 끝 : 능동적인 삶을 살기 위한 노력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깨달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빈 사과 궤짝을 주어다 파를 심게 되었다는 것이 시적인 통찰을 얻게 되는 구체적인 일상 경험이다. 이 시는 이 경험을 삽화적으로 제시하면서,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상념을 어조를 변화시켜 가며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시적 화자가 파를 심게 된 계기는 타율적이다. 아내에 의해 잠을 깨어 억지로 끌려가 궤짝에 흙을 담아 온다. 그 흙에 파를 심으면서 시적 화자는 '벌거벗은 나무들이 은빛 깁을 두른 산'을 그리워한다. 벌거벗은 나무처럼 메마르고 헐벗은 삶에 시달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흰 눈을 은색 비단처럼 두른 것처럼 찬란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다. 그는 그런 산속에 한동안 묻혀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그러나 이 생각을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내의 핀잔은 시적 화자를 일상 속으로 되돌려 놓고 만다. 시적 화자는 결국 자신이 현실의 속박을 벗어던지기 어려움을 깨닫는다. 마지막 부분의 '뜯어먹자 매운 파'는 답답한 일상에 대한 역설적인 긍정이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궤짝 속의 파처럼 매운 냄새를 지니면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이면서 일상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 감상을 위한 읽을거리 <퍼온 글> 시적인 소재는 고아한 감정의 세계나 명상적인 철학의 논리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체험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시적인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체험의 단순한 집합이 곧 시적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적절한 깨달음과 시적 형상화가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마종하의 <파 냄새 속에서>는 일상의 삶의 경험이 시적 통찰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빈 사과 궤짝을 주워다 파를 심게 되었다는 것이 시적인 통찰을 얻게 되는 구체적인 일상경험이다. 파를 심게 되는 과정은 다분히 수동적이다. 긴긴 잠을 깨게 되었고 억지로 끌려가 흙을 담는다. 그러나 이 수동적인 과정에서 시인은 잠시나마 '발가벗은 나무'들이 은깁을 두른 산을 그리워한다. 벌거벗은 나무처럼 헐벗은 삶의 허기에 시달리는 시인은 흰눈을 은깁처럼 두르고 있는 산에서 다소의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궤짝 속에 있는 흙이 아니라 산에서 살고자 하는 소원은 간단히 묵살된다. 일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는 근원적인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잠시 가져보는 것이지만 실현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 욕망을 버젓하게 드러내놓지 못하고 괄호 안에 묶어 놓은 시인의 의도에서 우리는 괄호 속에서 시인의 조심스러운 욕망과 그 서글픈 드러냄을 읽을 수 있다. 현실의 완강한 속박은 길다란 궤짝 속의 삶, 일상의 삶에 만족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4연은 답답한 일상에 대한 역설적인 긍정이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궤짝 속의 파처럼 매운 냄새를 지니면서 살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 삶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이면서 삶에 부과되는 고통에 대한 수락이다. 또한 일상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매워서 눈물나는 삶, 파냄새처럼 강렬한 삶을 살자는 다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설:유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