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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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2008.04.01 09:42

정문선 조회 수:107 추천:25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손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타는 목마름으로>(1982)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비판적, 저항적, 의지적, 현실참여적, 서정적, 상징적, 점층적 ◆ 표현 : 상징적 시어 구사 반복에 의한 내재적 리듬 형성 의인화('너'), 점층적 시상 전개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신새벽 뒷골목 → 밝은 곳에서 떳떳하게 민주주의를 부르지 못하는 시대현실 시간상 밝음의 이미지(순수와 자유의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와 공간상 어둠의 이미지 (감추어지고 그늘진 뒷골목이라는 공간)가 교차됨.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서정적 자아가 민주주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 토로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 → 현실의 억압 때문에 잊고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을, 염원과 갈망의 힘으로 끈질기게 되새긴다는 표현. * 목마름 →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추상적 관념에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 * 남몰래 쓴다 →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행위에서 비극적 연민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표현. *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 →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바람직한 사회 구현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암시 * 신음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 공포와 고통의 시대상황 암시 * 그 속에 내 가슴팍에 →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고통을 견디는 현실의 모습들을 자아의 내면에 동화시킴 * 외로운 눈부심 → 모순어법. 민주주의를 향한 고통과 희망이 동시에 스며있는 표현임. 민주주의라는 말은 지배자들의 눈길을 피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그럴수록 민주주의는 눈부신 보석처럼 어둠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 *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 민주주의, 자유 시대에 대한 희망스런 기억 자유민주주의 실현의 열망이 감각적으로 나타난 표현 * 서툰 솜씨로 / 쓴다 → 낙관적인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부르짖는 민주주의 실현의 추구는, 분노와 슬픔의 심정에서 나온 초라한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표현. * 3연 → 가슴 속 강한 열망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와 내용과 표현에서 유사한 발상을 보임. ◆ 주제 : 민주주의 실현에의 강한 열망과 기다림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 2연 : 억압적 현실과 민주주의의 회복에 대한 열망 ◆ 3연 : 민주주에 대한 열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70년대를 온통 수형(受刑) 생활로 보낸 시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유신 체제의 질식할 듯한 폭압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의 열망을 온몸으로 절규함으로써 그를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우뚝 서게 한 이 시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신 새벽 뒷골목에 남 몰래 쓰'는 시적 상황 속에 당시의 현실이 선명하게 집약되어 있다. 시인은 첫째 연에서 '신 새벽'이라는 시간과 '뒷골목'이라는 공간이 갖는 복합적 의미 구조를 통해 화자가 처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신새벽'은 순수와 자유의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이고, '뒷골목'은 그늘지고 어두운 공간을 표상하므로 시인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역설적 원리를 대입한다면,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이 심할수록 조국의 민주주의도 그 속에서 싹을 틔운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뒷골목 같은 후미진 곳에서만 간신히 행해지는 민주화 투쟁을 보여 줌으로써 현실 상황이 얼마나 폭압적인가 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연은 여러 가지 소리의 중첩을 통해 이 시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발자욱 소리'에서부터 '탄식 소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 사건의 서술은 일절 배제되어 있으면서도 그 소리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살벌한 상황이 읽는 이의 상상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해 주고 있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의 분노와 비통함으로 흐느끼면서 뒷골목의 나무 판자에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쓴다. 뒷골목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 남몰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이 구절은 그 어떤 산문적 서술보다 뚜렷하게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시대의 아픔을 넘어 '저 푸르른 자유'로 달려가겠다는 비장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김지하와 민주주의] 김지하 시인은 '6.3 사태'(1964) 당시 대일(對日)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참가한 이후 1970년대를 온통 도피와 체포와 투옥을 거듭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를 날을 애타게 염원하며 절규하듯 살아왔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엔 많은 말이나 수사보다도 그의 양심 선언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고행 1974]와 인혁당 사건에 관한 내외 신문 기자 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재수감되었을 때, 정부에서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세웠는데, 그 때 김지하는 방대한 분량의 양심 선언을 하게 된다.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이다. 내가 카톨릭 신자이며, 억압받는 한국 민중의 하나이며, 특권, 부패, 독재 권력을 철저히 증오하는 한 젊은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 자신을 굳이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나는 이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