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서화 8

by 박영호 posted May 0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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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화 8

    겸재 정선의 많은 작품중에서도 이 금강산전도는 너무 유명한 실경산수화의 대표 되는그림입니다. 이 작품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꼭 알고 지내야 하므로 좀 길지만 꼭 읽어 두시기 바랍니다.-원미산

     

     

     

     

     

정선(鄭敾)금강전도(金剛全圖)

 

이 그림(오른쪽)은 금강산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한국적 산수 화풍을 정착시킨 그림으로 한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금강산을 한국인의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는 그림이다. 한국인들이 금강산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이 그림을 통해서 살펴본다.

 

정선(鄭敾, 1676-1759)

    정선(鄭敾, 1676-1759)의 본관은 광산(光山:光州)이며,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김창집의 권고로 도화서에 들어갔으며, 후에 양천(陽川)을 비롯 세 개의 현에서 현감을 지냈고, 또 종4품의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을 지냈다. 화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畵法)이나 채색화(彩色畵)의 맥을 이어받아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실경산수를 대성시킨 화가로 한국회화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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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의의 및 내용

 

〈금강전도〉는 겸재가 만 58세 때인 1734년 겨울 금강산 전경을 만폭동(萬瀑洞)을 중심으로 하여 그린 것이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130.6cm, 가로 59Cm이며, 종이에 옅은 채색으로 그렸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금강전도〉는 관념 산수의 틀을 벗어버리고, 우리 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 기법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산수화의 신기원을 이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그림 윗부분에는 비로봉 이 우뚝 서 있고 거기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을 지나 아랫부분 끝에는 장안사의 비홍교 가 보인다. 그림의 상 부에는 좌측에 ‘金剛全圖 謙齋’라는 관서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고 우측에 반원형을 이룬 칠언시 적혀 있다. 더불어 ‘甲寅冬題’라고 제작 시기를 밝혀 놓았다.

  
작화의 전통

 

금강산을 그리는 전통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형성되어 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금강산이 중국이나 일본의 사신들에게 주기 위하여 종종 그려지곤 하였다. 조선 중기에도 여전히 금강산도가 계속해서 그려졌음이 기록들에 의해 확인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금강산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겸재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예컨대 김응환, 조정규, 엄치욱, 김홍도, 최북, 이인문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의 금강산 그림은 산의 전경이라기보다 이름난 명소(名所)를 중심으로 하여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겸재의 〈금강전도〉는 산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른다 해도 한 시점(視点)에서 금강산 전체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금강전도는 겸재가 금강산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금강산은 경관이 빼어난 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와 차원을 달리하는 이상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본 사람은 본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보지 못한 대로 외경과 동경의 마음으로 보는 산이 바로 금강산이었던 것이다.
그림에 쓰여 있는 칠언시를 통해서 금강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이 그림의 화의(畵意)를 알 수가 있다.

만이천봉의 개골산
(萬二千峰皆骨山)

누가 그 진면목을 그릴 수 있을까.
(何人用意寫眞顔)

산에서 나는 뭇 향기는 동해 밖에 떠오르고
(衆香浮動扶桑外)

그 쌓인 기운은 온누리에 서리었네.
(積氣雄蟠世界間)

 떨기 연꽃은 해맑은 자태를 드러내고
(幾朶芙蓉揚素彩)

송백 숲은 선사(禪寺) 문을 가리었네,
(半林松栢隱玄關)

비록 걸어서 이제 꼭 찾아 간다고 해도
(縱令脚踏須今遍)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
(爭似枕邊看不 )

 

여기서 산봉우리를 부용[연꽃]에 비유하고, 선사(禪寺)를 말하고 있는 것 등은 불교적 세계관과의 관련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금강산이라고 하는 산 이름 자체와, 일만이천봉으로 말하는 것도 모두 불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신라 시대에는 오대산 신앙과는 별도로 산과 관련된 불국토관(佛國土觀)에는 금강산을 법기보살(法起菩薩:曇無竭菩薩)의 주처(住處)라고 믿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법기보살의 주처로서 금강산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실차난다가 번역한 〈팔십화엄경 八十華嚴經〉에서의 일이다.
〈팔십화엄경제보살주처품 八十華嚴經諸菩薩住處品〉 제32를 보면 방위별로 산 이름을 열거하고, 그 이전부터 여러 보살들이 거기에 머물러 살았음을 이야기하고, 현재 어느 보살이 권속 얼마를 거느리고 어느 산에 머무르면서 법을 설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다.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해중 금강산(海中 金剛山)’이라 하고, 법기보살이 그곳에 거처하여 1,200인의 권속을 거느리고 지금도 설법하고 있다고 했다.
또, 징관(澄觀)이라는 사람은 동해의 동쪽에 금강이라는 산이 있다 하였다. 또 해동인(海東人)은 예로부터 서로 전하기를 이 산에 왕왕 성인이 출현한다고 하였으며, 또 해중에는 두 주처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 담무갈보살이 1만2천의 보살을 권속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금강산이라는 산 이름과 오늘날까지 민간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는 말은 불교적 세계관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전문학 작품에서도 금강산을 불국토(佛國土)로 묘사하고 있는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의 《장편가집 長篇歌集》에 수록되어 있는 필자 미상의 〈금강산가〉를 보면,

 

“삼불동 들어가니 완연한 삼불바위 합장한 듯 세웠는가 좋고 좋고 좋은 경이 이 아니 극락인가?…… 사해 팔계 벗님네야 극락세계 구경하소 적선하면 극락이요 유죄하면 지옥이라”

 

하면서 금강산을 불교에서의 이상세계인 극락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금강속별곡〉에는

 

업경 (業鏡臺) 어이 야 삼견 고, 디부(地部) 명왕(明王)이 차뎨(次第)로 버러 안자, 인간(人間) 션악(善惡)을 난나치 분간 니, 고금(古今) 쳔하(天下)애 긔군녕신(欺君 臣)과 오국권간(誤國權姦)이 화탕 디옥(地獄)에 며치나 드런 고”

하는 등 금강산을 불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음을 본다.

  
도교적 세계관

 

이렇게 보면 불교가 압도적으로 금강산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 사상이 〈금강전도〉의 절대적인 배경이 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도교적 세계관에서 바라 본 금강산의 모습도 또한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여름의 금강산을 일러 봉래산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도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도교의 신선설에는 삼신산(三神山)이라는 것이 있다. 신선이 살고 있고 불로초가 자란다고 하는 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를 말한다. 이중 봉래산에 대해서 《산해경 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는

 

“봉래산은 바다 가운데 있다(蓬萊山 在海中)”

고 하고, 그 주(註)에

“신선이 살고 있는데, 궁실은 모두 금과 옥으로 되어 있고 새와 짐승은 모두 희다. 멀리서 바라다보면 구름 같고 발해의 가운데 있다”
(上有仙人 宮室皆以金玉爲之 鳥獸盡白 望之如雲 在渤海中也)

고 하였으며, 《사기 史記》 진시황기(秦始皇記)에서는,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봉래 방장 영주라 한다”
(海中有 三神山 名曰 蓬萊 方丈 瀛州)

라 하였고,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은 발해 가운데 있다.…… 여러 신선과 불사약이 있다. 그곳의 물건이나 금수는 모두 희며,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蓬萊 方丈 瀛州 此三神山者 在渤海中 蓋嘗有至者 諸仙人及不死藥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白銀爲宮闕)

하였다.
이 내용을 통해서 보면 봉래산은 발해 중에 떠 있는 영산(靈山)이며, 거기에는 여러 신선들과 불사약이 있는 곳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도교의 신선설과 관련하여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발해 동쪽을 우리 나라로 비정(比定)하였으며, 그 가운데 있는 산, 즉 금강산을 봉래산에 비유했던 것이다.

 

금강산을 봉래산에 비유하고 있는 예는 당시의 가사문학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금강산 기행의 감회를 노래한 조우인의 〈관동속별곡〉의,

“단발령(斷髮嶺) 노픈 재 일슌(一瞬)에 올라 안자 쌍모(雙眸) 거드 말리(萬里)예 드러 보니 봉 (蓬萊) 샹산(海上山)이 지쳑(咫尺)에 뵈노 라”


라는 대목이나, 박순우의 〈금강별곡〉의

“강원도 금강산이 삼산(三山)중 일산(一山)이라. 동방의 제일이요 천하의 무쌍이다. 천리를 불원하고 일견이 원이러니…”

 

라고 한 것 외에도 수많은 금강산 기행가사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금강산은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선이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고 불로초가 자라고 있는 도교적 이상세계였으며, 또한 그것은 외경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금강산은 불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민간신앙 속에도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산이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금강산을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탐승하면 사후에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그것이 어려울 땐 그림을 구해 걸어 놓고 간절히 기원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민화 금강산도를 그렸던 화공들의 처지에서 금강산을 실제로 유람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보나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지도 못한 금강산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렸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 금강산 그림을 집에 걸어 놓고 마치 금강산을 눈앞에 대하듯 대용(代用)의 쾌감을 맛보곤 했던 것이다.

 

이렇듯 금강산은 민간인들 사이에는 구복신앙의 성지처럼 인식되고 있었고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찾아가 보고 싶어하는 동경과 외경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신앙

 

금강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희구하여 마지않았던 이상세계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의 불국정토일 수도 있고, 도교의 신선경(神仙景)일 수도 있으며, 무교나 민간신앙의 성소(聖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산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생활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거나, 취미 삼아 화필을 농하는 차원이 아니라, 제약된 현실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신앙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내용 분석

 

금강산을 그리되 눈앞의 소경(小景) 묘사만으로는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심오한 상징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금강전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토산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전경을 화면 가득히 채워 그리되, 윗쪽에 다소 여유 있는 공간을 두고 있고, 아래 오른쪽 모퉁이는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 결과로 화면 전체는 원형 구도를 이루게 되어 보는 이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효과를 얻고 있으며, 따라서 화면의 금강산이 산수 절경이라는 느낌보다 하나의 독립된 소우주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화면의 금강산은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지리상 개념의 금강산을 초월한 신비화되고 상징화된 금강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금강산의 이러한 모습은 《팔십화엄경》에서 말하는 ‘東海中의 金剛山’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산해경》 등에서 말하는 ‘蓬萊山 在海中’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으며, 불국정토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감상 및 평가

 

결국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실화(寫實畵)가 아니라,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나 신비감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그린 상징성 짙은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제에서 말했듯이 겸재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리고 또 그것을 감상하기를 즐겨했던 것은 미술의식이라기 보다도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민족적·종교적 상징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