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오늘:
28
어제:
47
전체:
458,146


수필
2016.11.07 13:19

또 다시 창 앞에서

조회 수 4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또 다시 창 앞에서 /   홍인숙(Grace)



  
중학교 이 학년 때였다. 교내 백일장이 열리었다.
참가하는 친구를 따라갔었다. 열심히 쓰는 친구 옆에서 실컷 놀다보니 슬그머니 나도 한번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감 시간 십 오 분전을 알리는 사일렌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써내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 운
좋게도 중. 고등학교 전체 장원으로 뽑혔다.
그날의 시의 주제가 바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창]이었다.

그때의 철없던 소녀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 삶의 내음이 구석구석 밴 중년의 길목에서 뜻밖에
한국 일보 [여성의 창]지면을 맡게 되었으니 새삼, 이 창이라는 낱말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유난히도 까탈스럽고, 무엇이든지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나의 학창시절에 비쳐진 창 밖의  
세상은 내 척도로 재어 판단하는 만만한(?)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지되어 있을 것 같던 그 오만과 후회의 세월은 덧없이 가 버리고, 이제
는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느슨하게 삶에 침잠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열병을 치르듯 외로움을 타며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적응책으로 가슴 깊이 간직
했던 꿈을 하나 둘 포기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차츰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그 꿈과 오만이 가득했던 자리에 슬며시 열등감
마저 비집고 들어올 정도가 되었다.
나의 자포자기(?)와 천국에 소망을 둔 종교가 만들어 낸 새로운 나의 모습이다.

가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도 된다. 하지만 창에 코를 대듯 바싹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볼 때, 오히
려 더 크고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자위하며,  얼룩진 창으로 바른 사물을 볼 수 없듯이 허공
으로 떠도는 나 자신을 더욱 추슬러 좀더 진실한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사십대도 중반의 창턱에 서 있다. 아직도 가끔은 가슴 깊은 곳으로 쌉싸르한 아픔이 맴
돌다 간다.
하지만 어쩌랴.
이, 세상으로 치닫는 욕망의 끈을 푸른 하늘가로 하나, 둘 슬쩍슬쩍 놓아 버릴 때 비로소 난
자유로워지는 것을.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홍인숙(Grace)의 인사 ★ 1 그레이스 2004.08.20 1601
69 안개 자욱한 날에 홍인숙 2003.08.03 590
68 시와 에세이 시인과 열 두 송이의 노랑 장미 홍인숙 2003.06.26 1031
67 어머니의 미소 홍인숙 2003.06.23 592
66 수필 새봄 아저씨 (2) / 아저씨는 떠나고... 홍인숙 2003.05.31 927
65 수필 새봄 아저씨 (1) 홍인숙 2003.05.31 758
64 사랑의 간격 홍인숙 2003.05.12 565
63 단상 내 안의 그대에게 (1) 홍인숙(그레이스) 2004.07.30 967
62 자화상 홍인숙 2003.05.12 539
61 마주보기 홍인숙 2003.04.26 568
60 가곡시 서울, 그 가고픈 곳 홍인숙(그레이스) 2004.08.04 1288
59 시와 에세이 아버지의 아침 홍인숙 2003.04.23 841
58 부활의 노래 홍인숙 2003.04.19 870
57 꽃눈 (花雪) 홍인숙 2003.04.08 558
56 봄날의 희망 홍인숙 2003.03.18 533
55 인연(1) 홍인숙 2003.03.18 520
54 노을 홍인숙 2003.03.14 491
53 봄은.. 홍인숙 2003.03.14 523
52 수필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위하여 / 밤의 묵상 홍인숙 2003.03.03 971
51 시와 에세이 사랑한다는 것으로 홍인숙 2003.03.03 934
50 시와 에세이 마주보기 홍인숙 2003.03.03 757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Nex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