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와 춧불시위

2016.12.08 09:07

김학천 조회 수:192

  신라 헌강왕이 동해안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동해용이 심술부린 것을 안 왕은 근처에 절을 세워 달래주었다. 그러자 동해용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아들 처용에게 왕을 따라가게 했다. 
  환궁한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높은 벼슬도 주고 미녀를 아내로 주었다. 한데 그 아내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신해 밤에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보니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처용은 한숨을 쉬고는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달 밝은 서라벌에 밤늦게 놀다/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나의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러자 역신은 사통에도 노여움을 내지 않는 처용의 마음에 감탄하여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꿇어앉아 '이후로는 공의 형상이 보이는 집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했다. 이 후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역귀를 물리쳤다. 신라 향가 '처용가' 얘기다. 
  천여 년 후 비슷한 노래가 나올 법하다. '달 밝은 서울에서 어느 날/ 푸른 궁전을 들여다보니/ 신발이 넷이어라/ 둘은 우리 것인데/ 다른 둘은 누구 것인가?' 경천동지할 이 역신과의 사통에 놀란 군중들은 촛불 들고 모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가라 외쳤다. 그러나 역신과 그 주위 패거리들은 기이한 주문을 외우며 감추고 숨는다. 
  억장이 무너진 군중이 나서서 노래한다. '그대 보기 역겨워/ 가시라고 할 때에/ 말없이 고이 가시옵소서/ 광화문 북악산 촛불 불꽃/ 백만 모아 가실 길에 밝히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타오르는 그 불길 따라/ 어서 가시옵소서!/ 그대 보기가 역겨워/ 가시라고 할 때에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진달래꽃' 변곡) 
  그러나 웬걸? 그대는 되려 유체이탈의 신통력으로 군중을 미혹하고 마법의 덫을 놓는다. 노림수에 화난 백만의 촛불은 수백만이 되고 작은 촛불은 이제 거대한 횃불로 바뀌어 간다. 
  그리곤 또 다른 군중이 일어나 노래하며 한탄한다. '아아, 님은 아직도 안 갔습니다. 믿지 못할 나의 님은 아직도 머물러 있습니다. 푸른 궁전을 둘러싸고 촛불 숲을 이루어 우린 저 드넓은 광장을 메우고 외치고 있습니다./ 아아, 우린 이미 님을 보냈지만은 님은 아니 떠나려 합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배신과 분노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기만 합니다.' ('님의 침묵' 변곡) 
  그래도 님은 귀 막고 눈 가리고 어둠 속에서 조소로 답한다. 비웃음의 키스로 봉인된 '광화문 초대장'을 받은 군중들은 분노가 폭발하고 소리 높여 노래한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가 광화문 광장에 울려 퍼진다. 
  광(光)은 꿇어앉은 사람이 머리에 불을 이고 있는 형상이고, 화(化)는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사람이 바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지금의 광화문 촛불시위를 미리 예견해 마련한 부적이었을까? 그러나 이 부적마저 신통력을 발휘 못 한다면 처용가라도 다시 불러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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