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세상, 잘 살아내자
2016.12.26 09:26
12142016 짜증나는 세상, 잘 살아내자
송년회 모임이다. 매 해 귀찮게만 생각되더니 올해엔 반짝 신경이 쓰인다. 가자. 애쓰는 10년 후배 회장단들 돕는 마음도 있고, 적조한 동창들 소식이라도 듣고, 운 좋으면 얼굴까지 볼 수 있다. 거기엔 음악도 있고, 이런저런 눈치 안 봐도 된다. 리듬에 맞춰 신명나게 흔들고 나면 짜증나던 세상사 털어 버리게 될 것이다.
예상 인원이 거의 채워진 테이블들이 안정감을 준다. 동창회 임원진들이 우선 안심을 했을터, 참석자로서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한 번쯤 이런 일들을 계획하고 진행해본 경험자들만이 갖는 고뇌다. 예약 된 장소와 음식들. 인원이 채워지지 않을 시 초래되는 지출과의 전쟁. 부작용이 한 둘인가.
예산을 초과해서라도 음악과 사회를 겸한 사람을 초대했구나. 잘했다. 무슨 재주로 우리들 중 누가 해마다 고령화 되고 있는 동창 모임의 회원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 줄 수 있겠나. 예전엔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곤 했는데, 요즘은 아무리 놀라운 웃음거리를 접해도 감동이 없다. 앞에서 재롱 떠는 사람이야말로 죽을 맛이다. 열심히 준비해 온 게임이나 웃기는 소리에 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마치 말 배우는 어린애가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말끄러미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듯이, 사회자를 쳐다보는 눈들이 해맑기만 하다. 유치원이 아닌 노치원에 앉혀 논 나이든 애기들이다.
사회자가 준비한 게임을 하려 해도 청팀, 백팀으로 나누고 주장을 뽑고 참가자들이 있어야 한다. 두 번, 세 번, 자아 나오세요. 누구 주장을 뽑아 주세요. 호응을 받지 못하는 사회자의 고충을 누가 알까. 이런 상태가 2분, 3분 계속 되면서 송년회 분위기는 아예 알아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양 썰렁해진다.
이대로 나 몰라라 침묵해서는 안 되겠다. 분위기를 살려야 된다. 자진해서 우리 팀 주장으로 나섰다. 그러면 뭐하나. 상대팀 주장이 없는걸. 상대팀으로 가서 한 바퀴 돌아본다. 가장 그럴듯한 주장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청을 거절하지 않을 듯한 11년 선배님께로 가서 떼를 쓴다. 계속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는 표정으로 사정을 하신다.
죄송합니다. 우리 둘이 그냥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이 엉성한 분위기를 살려봐야죠. 춤이라곤 제대로 배워보지도 못한 몸치인 나. 누군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싶겠어요. 음악 나오면 춤추고 게임에 열심히 응하며 푹 쳐져 있는 동창들에게 활기를 넣어 주려 애쓰면서도 막상 나 자신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느낀다.
무엇이 우리에게서 마음 편히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는 기분을 갈취 해 갔을까. 대통령 탄핵이 결정 된 우리 조국의 미래일까. 한국이던, 미국이던 어디에 발 딛고 살던, 우린 편할 수 없다. 오늘까지 살아 온 것도 쉽지 않았지만 기필코 잘 살아내야 한다. 꼭 잘 살아내자.
사회자가 해 줬음 좋을법한 덕담을 내가 대신 했다. 일 년에 한 번 뿐인 동창회 모임인데 이렇게 기분전환도 못한 채 헤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만 마이크를 잡았다. 잠깐이라도 흥이 나서 큰소리로 웃어 보기도 하고 계속되는 우울한 날들이지만 기필코 잘 살아 내겠다고 다 함께 다짐하자고 제안을 했던 송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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