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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삶과 죽음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2018.02.04 03:23

라만섭 조회 수:78

삶과 죽음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라만섭

기록에 의하면 고대 희랍인들은 우주의 모습을 둥글다고 여겨 왔다고 한다. 기원전 고대 희랍 철학자들은 지구의 모양도 둥글다고 생각 했다고 한다. 끝없이 광활한 우주의 모양을 인간의 육안으로 확인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적어도 지구의 모습이 둥근 원형인 것은,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공간에서 촬영한 지구의 사진이 말해 준다.


지구가 완벽한 원형이 아니고 타원형인 이유는, 자전에서 오는 원심력의 영향 이라고 한다. 행성의 공전 궤도도 역시 타원형 이라고 한다. 둥근 원에는 끝과 시작이 따로 없다. 시작은 끝으로, 끝은 시작으로 계속 이어진다. 둘 사이를 갈라 놓는 경계선이 없다.

삶과 죽음도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지 않을 까. 삶은 죽음의 시작이오, 죽음은 삶의 끝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알려 주는 신호 이다. 생로병사의 연속 이다. 모든 현상은 태어나고 성장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죽음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삶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쇠퇴(Decay)는 모든 구성물의 속성 이다. 존재 하는 모든 것은 흐름(Flux)과 생성의 연속 이다. 순간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 한다.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과정을 반복 한다. 일생 동안 우리 몸 안에서는 세포 분열(Cell Division)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몸에는 약 60조에 달하는 세포가 있는데, 1초에 약50만개가 죽고 태어나는 재생 과정을 반복해 가고 있다고 한다. 낡은 세포는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언제나 똑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비 영구성(Impermanence)은 현실에 살아 있는 개념 이라고 하겠다.

죽음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의 일부로 태어났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 과정의 일부 이다. 사후의 천당, 지옥을 그대로 믿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윤회, 전생, 내세 등등의 불교적 개념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붉게 타오르는 황혼의 길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죽음은 완전한 종말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단계에서는 현세에서 겪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밑거름 삼아,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 한다. 이렇게 생각 할 때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숭고하고 엄숙한 현상(순환 과정)으로 인식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 날수 없는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의 삶 또한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 안에서 맴돈다. 인과응보에서 비롯되는 온갖 고통은, 해탈(Nirvana)을 통해서 구제될 수 있는 문제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친다. 그렇게 되면 죽음이 없는 영원(Eternity)의 길이 열리는 것인가. 이에 대한 영원한 해답은 어디서 찾을 것 인가.


분명한 사실은 우주 안의 만물은, 간단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물처럼 흐르는 삶의 순간순간이 이어 지면서, 하나의 지속적인 흐름을 이루어 간다. 대지에 뿌려 진 , 생명을 낳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며 곧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서, 또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을 거듭하는 자연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 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잠시 휴식이 있을 뿐 경계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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