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백남규
아내가 떠난지 3년이 지났다. 겨울이다. 어둠속에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본다. 창 너머 학교운동장이 비에 젖어 번들거린다. 빗방울에 머리카락이 젖고 웃옷에는 빗물이 흘러들어 가슴께가 젖어들고 있다. 열쇠를 잃어버려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파트복도에 서 있다. 매니저는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어디 먼 곳으로 출타중인지 아무리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다. 애꿎은 담배만 벌써 다섯대 피우고 있다. 쓸쓸했다. 돈 떨어지니 여자도 떨어지고 집도 사라졌다. 등따시고 배부른 세월이 나에겐 참 어려운가보다. 비안개속으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날도 비가 왔었다. 중학교 2학년때였다. 기한을 훨씬 넘겨서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학교앞 오락실에서 같은 이유로 쫓겨난 친구와 오락을 했었다. 집에 가봤자 없는 돈이 생길 것도 아니고 파출부인 엄마에게 이야기해봐야 가슴만 아플 뿐 별다른 대책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날따라 오락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적군에게 묵사발이 되어 신나게 얻어터지고 땅에 뻗어버렸다. 오락실 앞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서 있을때 어디선가 어버지가 불쑥 나타났다.
“너 왜 학교 안 가고 그러고 있니?”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 노무자슥 없는 돈에 핵교 보냈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과 오락실에 들락거려.”
어디서 막대기를 하나 줏어 들고 사정없이 나를 두둘겨 팼다.
나는 말없이 맞었다. 억울했지만 비가 와서 일도 못나가고 낮술에 벌개진 아버지를 보니 불쌍했다.
보다못해 옆의 친구가
“기태 아버지 그만하세요.”
“등록금 못내서 쫓겨났단 말이에요.”
아버지는 갑자기 뻥뚫린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딴 아이들이 할아버지로 오해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 사십이 다 되어서야 겨우 결혼한 탓도 있지만 고생을 많이 해서 실제 나이보다 한참 늙어보였다. 공사장 인부였던 아버지는 소주를 좋아하셨다. 술힘으로 일한다시며 매일 술을 드셨다. 고랑처럼 패인 이마의 굵은 주름과 어쩌다 웃으실 때 보이는 누런 이빨들은 담뱃진에 찌들어 거무스레했다.
아버지는 그날 술을 많이 드셨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아무나 붙잡고 행패를 부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오시다가 지나가던 버스에 치여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고학을 하다싶이 간신히 고등학교를 나오고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먹고 자고는 몰라도 학비를 혼자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먹는 것, 자는 것도 해결하기도 벅찼다. 간신히 일년을 마치고 중퇴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오한이 났다. 당장 내일 이 넓은 엘에이에서 내 몸을 어디에 눕힐것인가가 문제이다. 코 앞에 닥친 먹고 자는 문제가 발등에 불처럼 타고 있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비릿한 비냄새에 퀴퀴한 쓰레기 냄새가 섞여 코를 자극했다.
“어디로 가야지?”
막막했다. 나를 미국으로 데려온 누나는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누나도 나처럼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 파견된 미군과 어찌 어찌 사귀어 태평양을 건넜지만 곧 헤어지고 이것 저것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돈 없고 기술없고 얼굴 반반한 여자가 먹고 사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쉽게 돈이 벌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자고 자존심만 세어서 돈은 많지만 몸만 밝히는 사내는 죽어라고 싫어했다. 이왕 그 길을 택했으면 얼굴에 주름살 지기전에 한 밑천 잡기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가. 쓰잘데 없는 생각이 구름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나밖에 없는 누나도 비빌 언덕이 아니었다.
‘사는게 뭐 별거 있냐.’ 중얼거려 보지만 여느때와 달리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5년전 아내와 낯선 미국에 올때만 해도 원대한 꿈은 아니지만 조그만 꿈은 있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은 아니라도 차도 사고 집도 사서 남들처럼 사람답게 오손도손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잔뜩 품고 비행기를 탔었다. 맨 손으로 와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때문이다. 꿈의 나라 미국은 그러나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었다. 맨 주먹 붉은 피밖에 없는 사람들이 성공하기가 한국과 다름없이 어려웠다. 밤청소, 가드닝, 노가다, 세탁소 뒷일, 창고정리, 광고세일즈 ,식당딜리버리, 택시드라이버 등등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돈을 저축 할 수 없었다. 서울이나 엘 에이나 도시의 인상은 비슷했다. 겉모습은 차라리 서울이 더 화려한지도 모르겠다. 그저 경찰 복장이 조금 다르고 시도 때도 없이 엥 엥 거리고 나타나는 불자동차가 좀 다를까, 돈만 있으면 구하고자 하는 건 다 구할 수 있는 것도 똑 같았다. 그리고 돈이 내 수중에 없다는 것도 같았다.
식당에 웨이츄리스로 일하던 아내는 식당에 들락거리던 손님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다.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항상 세상에 따귀를 맞고 사는 것 같았을뿐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에 북받치지는 않았다. 몹시 쓸쓸했을 따름이다. 텅빈 방에 혼자 들어설 때 훅 끼치는 냉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훨씬 현세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소화불량이라든가 내일 마감인 집세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변통할 가능성도 없다는 것, 여자가 그립다는 것 뭐 이런 것이아닐까.
석달째 집세를 못 내자 철거통지서가 어제 배달되었다. 일주일내에 방을 비우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내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복도에 다닥 다닥 붙은 문들 중에 하나를 열면 방이 나타난다. 식탁엔 말라비틀어진 생선토막과 물기가 날라 가서 겉잎이 쪼그라진 김치가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다. 여기 저기 말라 붙은 밥풀에 바퀴벌레들이 제 세상 만난 것처럼 어지러이 돌아다닌다. 소주를 들이키며 불도 켜지 않은 감옥같은 방에서 오두마니 앉아 비에 젖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내일이면 이 작은 방에서조차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렇게 살아 무엇하나, 벼랑끝에서 절벽아래를 내려다보는 심정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끝장이 날 인생이라면 우울하고 슬픈 일이다. 아니 억울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인간이 영원히 못 살고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이 차라리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당장 죽을 생각은 나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실행할 정열이 없기 때문이다.
한달 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 우연히 친구 영식을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에 다니냐고 해서 , 안 다닌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교회 장로가 되어 있었다.
그 친구가 교회에 한 번 나오라고 했다. 일요일에 할 일도 딱이 없고 많은 사람들이 도데체 왜 교회에 다니는 지 궁금해서 한 번 나가보기로 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중에서 자기는 모태신앙이라고 자랑 비슷하게 말하 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부모님 종교를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야한다고 배워왔다는 사실이 신앙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특별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조그만 회사의 영업부에 있었기때문에 매일 거래처 사람들과 술집이나 들락거리며 살았었다. 세상에 좀더 가까이 섞여보고자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친척중에서 충청도이모님이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셨는데 밤길을 혼자가도 무섭지 않노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났다. 교회에 다니면 사람들은 무섭거나 외롭거나 앞날이 막막할때 자기를 돌봐 주시는 위대한 분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속으로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었다.
성경구절중에서 인상깊은 구절이 몇 개 있기는 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까지 내 놓아라.’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벗어 주라.’ 기독교 교리중에 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라는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데 아랍사람에게 오른빰을 호되게 맞은 후 왼 뺨을 내 놓은 것 같지는 않다. 현실에서 적용이 어려운 교리는 아무리 내용이 아름답다해도 인간살이에서 별로 소용이 없는 게 아닐까?
아무튼 내일이면 집, 아니 방을 비워야한다. 어디로 갈것인지 아직 모른다. 홈리스가 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수입이 떨어지면 페이먼트를 못하고 그러면 집에선 쫓겨나고 차는 가져가 버린다. 하릴없이 마켓카트를 끌면서 여기 저기 쏘다니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나라고 별수 있으랴.
한인타운에서 한 반시간 서쪽으로 차를 몰아가면 벨리라는 동네가 있다. 그 중에서도 시미벨리라고 한적한 동네에 친구가 다니는교회가 있었다. 일요일, 샤워하고 옷 입고 차를 몰아 집을 나설때, 맑고 투명한 햇살이 하늘에서 바로 내리 쪼이는 것이 참 좋았다. 설교는 시시했다. 왜냐하면 체험이 담기지 않은 설교였기때문이다. 장님이 빛에 대해서 뭐라고 주절거리는 것처럼 듣는 사람에게 하품을 자아내게하는 설교였다. 사랑에대한 이론을 많이 안다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아니다. 진실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사랑에 빠져 보아야 된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이론과 예화를 많이 안다고 몸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목사님을 보고 싶었다. 몸소 불쌍한 영혼을 진실로 사랑해본 체험이 있는 목자가 이 시대에 있을까? 있기는 하겠지만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소문으로 밥퍼목사로 유명한 어떤 목사님이 한국의 청량리588 동네의 창녀들과 거지와 깡패들을 위해서 라면을 매일 끓였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가벼운 찬탄이 나오기는 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몸에서 나는 역한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보통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신수양이 잘되어도 냄새나는 거지 몸을 만지기는 싫어하는 게 평범한 인간인데, 그 목사님은 먹이고 입히고 목욕까지 시켰다지 아마. 참 굉장한 목사님이구나 생각했다. 그 냄새를 어떻게 견디었을까? 참 대단하구나. 쇼우맨쉽으로 라도 즉 유명해지기 위해서 견딜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유명해지고 싶어도 그런 것을 감수할 사람은 흔하지 않는 법이다.
비속에 우두커니 망연자실 서 있은지 한 시간은 족히 넘었을 때, 복도 가운데 방문이 하나 열렸다. 복도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옆 방의 잭이 술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다가왔다. 자기는 내일 라스베가스로 이사가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눈이 퀭하고 비쩍 마른 잭은 옆방에 살았는데 가끔 한숨소리와 우는 소리가 벽을 통해 들려오곤 했었다.
“나도 내일 떠난다.”
어깨를 서양사람처럼 약간 들어올리며 두 손을 내저으며 아무튼 고맙다고 했다.
“왜 거기 서있냐?”
“열쇠를 잃어버렸다.”
그러면 잠시 자기방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돌아서는 잭의 등어리에 라스베가스로 떠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쓸쓸한 모습이 겹쳐졌다. 언젠가 본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의 주인공과 그는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다.
살다보면 여러종류의 날을 맞이한다. 화창한 날,비오는 날,흐린 날,바람 부는 날- 쨍하고 해뜰날이 나에게도 찿아올까? 아내가 떠나고 나자 나쁜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줄지어 찿아왔다. 교통위반 티켓을 연속 두 번 받은 후 기어이 큰 사고가 났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좌회전 하다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차에 받혀 죽을뻔했다. 양쪽 에어백이 펑 펑 터지고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우째 이런 일이 나에게 자꾸 일어날까? 다행인 것은 몸은 다치지 않았다. 정신은 혼란스러웠지만 말이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 차가 없으니 문서딜리버리를 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차는 토탈데미지(total damage)로 판정되어 얼마간의 돈으로 되돌아왔다. 이혼과 실직과 사고로 이어지는 나날속에서 드디어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파트 메니져는 밤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오두마니 앉아서 멀거니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빗소리가 적막함과 외로움을 더해준다.
기도가 하고 싶었다. 나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다. 사면초가였다. 쳐다볼 방향은 하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도는 간단했다.
‘하나님, 내일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거리에 나앉기는 싫습니다. 저에게 방을 주십시요.’
방바닥에 널부르져 누워 있는데 전화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웬 전화지? 하며
“여보세요.”
“기운 좀 내라.”
내 목소리가 죽어가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친구뿐이다. 영식이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며칠 전에 방을 내줘야할 형편이라고 신세한탄 한 걸 마음에 뒀나보다.
짐 싸서 우선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요즘 세상에 마음씨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처음으로 한 기도가 금방 효과가 나타나니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친구 마누라의 눈치가 더 사나워지기전에 방을 구해야했다. 일간지 하숙,아파트란과 구인,구직란을 샅샅이 훑었다. 제일 싼 하숙집에 전화하여 언제 방문할 지 약속했다.
한인타운 올림픽거리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크렌셔라는 길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집이었다. 좀 퇴락하기는 했지만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게이트철문이 녹이 슬어 벌겋다. 마당에는 큰 개가 두 마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자 개들은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주인은 50대 아줌마였다.
“아,전화 주셨던 분이죠?”
“네.”
최대한 예의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복도였다. 그런데 복도 한 복판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대낮인데도 얼굴이 벌겋게 취해 있었다. 에이.좆같은 세상,어쩌고 하면서 나를 한 번 슥 훑어보고 지나간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미스터 김은 노름에 빠져 마누라가 도망가고 지금은 밤이고 낮이고 소주 없이는 살 수 없는 폐인이 된 사람이었다. 방은 복도의 끝에 있었다.
‘빈 방이 하나밖에 안 남었어요.’ 방문을 열며 주인이 활기차게 말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방이 생각보다 너무 좁고 작았다. 겨우 한 사람이 눕고 책상과 의자가 간신히 들어갈 공간밖에 없었다. 오래 비어 있었는지
싸늘하고 퀴퀴한 냄새가 묻어나왔다. 선뜻 들어서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식사는 어떻게 하지요?”
“따라 오세요.”
주인 아줌마가 ‘요’자를 길게 빼면서 앞서 걸어나갔다. 복도를 벗어나 이층으로 올라가자 6인용 식탁과 대형 전기밥솥이 놓여 있었다. 주인은 보란듯이 밥솥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오래 된 듯한 밥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반찬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꺼내 먹으세요. 그리고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시간을 꼭 지키시구요. 공용 화장실과 욕실, 역시 공용의 세탁기가 있는 곳도 안내 받았다.
며칠 후 이사했다. 이사라기보다 이동이었다. 식탁이며 소파- 헤어진 아내가 산 꽃무늬 소파-는 그대로 두고 나왔기 때문에 짐이라곤 큰 가방 두개에 책 보따리 몇개가 전부였다. 짐을 옮긴 후 친구가 말했다.
“괜찮은거니?”
“괜찮아.” 나는 대답했다. 친구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친구는 가기전에 성경책과 봉투를 하나 두고 갔다.
봉투속엔 돈과 편지가 있었다. -살다보면 골짜기를 만나기도 한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기 바란다. 구약의 욥기를 꼭 읽어보게. 그리고 교회에 꼭 나와라.-
영식이는 마음씨가 고운 아이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일학년때다. 숙제를 못해간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성질이 사납고 별명이 ‘미친갱이’ 인 수학선생은 다른 건 몰라도 숙제를 안 해 온 학생에게는 사정을 두지 않고 미친듯이 때리는 벌을 내렸기때문이다. 전날 인쇄소에서 밤샘일을 한 나는 숙제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슬며시 내 책상위에 자기노트를 올려 았다. 영식을 제지할 틈이 없었다. 물론 영식은 학교생활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구타를 당했다.
영식은 그런 아이였다. 바보같이 착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영식이 아버지는 달랐다. 영식이 아버지는 농부였다.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기전에 말죽거리에 채소밭을 일구어 생계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돈벼락을 맞았다. 70년대 부터 강남개발붐이 일자 영식이 아버지의 논밭이 갑자기 금싸라기땅이 되어버렸기때문이다. 소위 벼락부자가 된 영식이 아버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게할 정도로 빠르게 변모했다. 그는 영식이가 다니던 교회에는 물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의 도리를 알 리도 없었고 즐겨하지도 않았다. 밤마다 룸사롱을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돈을 물쓰듯 썼지만 금고에 돈은 점점 늘어만갔다. 지금도 말죽거리 사거리에 10층짜리 빌딩을 비롯하여 서울 곳곳에 부동산과 전국 요소 요소에 사둔 땅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라만 가기때문에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여전히 잘 살고 있다고 영식이 전해 주었다.
봉사단체에서 성금을 요구하면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 며 외면했다. 그런 아버지였다. 그런데 영식이는 돌연변이였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있는대로 주었다.
친구가 돌아가자 방으로 돌아왔다. 좁고 누추한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욥기를 읽었다. 착한 욥은 사단의 악의로 부귀와 명예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몹쓸병에 걸렸다. 친구들이 찿아와서 위로대신 죄를 회개하라고 한다. 죄때문에 재난이 찿아왔다고 고난과 시련에 빠진 욥을 괴롭힌다. 인간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다. 반대로 고난에 빠지면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산전수전 겪어본 경험으로 언젠가부터 깨달은 것이다.- 죄때문에 걸리는 게 병이라면 도둑이나 사기꾼이 감기약을 먹으면 낫지 않아야 되는데, 그들도 감기약을 먹으면 낫기도 하는 것같다. 욥의 이야기는 실직과 이혼과 거듭되는 사고로 엉망이 된 몸과 마음에 위로가 안되었다. 대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부귀와 명예, 건강 이런 것을 사람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목록이다.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것은 신의 저주때문이라는 생각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소위 팔자라는 것이다. 너가 지금처럼 못 살고 고생하는 것은 운명때문이라는 사상을 심어줄려고 예부터 무던히 애쓰는 계층이 있었다. 그래야 자신들의 행복이 보장이 되기때문일까? 내 생각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란 부모이다. 왜냐하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기때문이다. 어떤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인가가 그 아이의 운명을 절반이상 결정해버린다. 부모의 형질과 사회,경제적 환경이 어린 아이의 운명이 아닐까,적어도 철이 날 때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태어난 시대와 장소가 다른 것을 결정해버린다. 하루살이 생명이 불행하게도 태어난 날이 비오는 날이었다면 하루종일 비맞고 저 세상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이 아니고 재수없게 평양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위대한 수령 어쩌고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아무튼 이런 생각은 인간의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삶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사상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합격발표때만 되면 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기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청소부이고 어머니는 파출부인데 그 어려운 형편에 주경야독하여 고시에 패스한 자랑스러운 고학생의 사진이 자주 실리곤했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고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를 피울 수 있고,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다. 머리가 좋지 못하고 강한 욕망과-꼭 성공하리라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어금니 꽉 깨물지 못한 개인의 잘못이라는 것-지금 가난하고 퀴퀴하고 좁은 방에서 이렇게 업드려 사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이 시대는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시대인 것 같다. 끊임없이 인간의 시선과 의식을 유혹하는 물질 소비시대이다. 물질을 소비하려면 돈이 있어야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은 백화점과 상점마다 가득찬 상품이 요염하게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어느 잡지에 실린글이 생각난다. 현대의 행복한 얼굴은 백화점 앞에서 양 손에 주체할 수 없이 옷이며 물건을 잔뜩 사든 여인의 얼굴이라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허용된 제한된 행복이라는 것이 최대의 단점이지만-부질없는 생각이다. 지금의 나에겐 현실적으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내일 부터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신문의 구직란에서 내가 할만한 일을 찿아서 헤맨지 달포가 지났다. 차가 없어서 가까운 한인타운의 업소를 중심으로 발에 땀이 나게 돌아다녔다. 번번이 거절당하자 기운이 쭉 빠졌다. 힘들고 더럽고 남들이 하기 싫은 일조차 나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친구가 준 돈을 다 털어서 소주를 샀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한 잔 또 한 잔 독약을 털어넣듯 마셨다. 답답했다. 미칠 것같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볕에 타고 찌들어 거무튀튀한 얼굴과 더듬거리는 말투와 소눈같이 착한 눈에서 흘리던 눈물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소주 3병을 마시자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나는 악을 썼다. 술병을 있는 힘을 다하여 던지자 퍽 소리를 내고 병은 깨졌다.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높고 긴 벽이 나를 가로 막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벽을 넘어 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벽을 두드리고 주먹을 치고 머리를 부딪혔다. 기진맥진해서 벽 앞에 널부려졌다. 어느덧 나는 풀한포기 없는 벼랑끝에 서있다. 벼랑에 서 내려다 본 절벽아래 푸른 물이 넘실거린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보다 일찍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편안했다. 그런데 땅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았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라, 아들아’ 눈을 뜨자 휘황한 빛이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분이 공중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흠칫 놀라 일어났다. 방안은 여전히 어둡고 싸늘했다. 깨어진 유리병 조각이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냉수를 한 컵 마시고 시계를 보니 새벽5시 였다. 욥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어떻게 견디었을까. 부귀와 명예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온 몸을 갉아먹는 욕창에 시달리고 태어난 날을 저주 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믿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믿은 사람, 그의 아픈 마음이 내 마음에 젖어들었다.
며칠 후 친구가 찿아왔다. 그동안 일때문에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열쇠를 하나 주었다. 이게 뭐냐고 하니 자기가 타던 차열쇠인데 ‘형편이 풀릴 때까지 타라’고 했다. 일자리도 하나 알아봤다고 했다. 기운내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했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손바닥에 전해왔다. 돌아서는 친구의 뒷모습에 언뜻 휘황한 빛이 보였다. 내 눈이 잘못되었나 하고 눈을 비벼 보았다. 분명 친구의 몸 근처에 밝은 빛이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하늘을 향한 내 마음의 빗장이 슬몃 열리는 듯했다.
11-12-05. 백남규.
백남규
아내가 떠난지 3년이 지났다. 겨울이다. 어둠속에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본다. 창 너머 학교운동장이 비에 젖어 번들거린다. 빗방울에 머리카락이 젖고 웃옷에는 빗물이 흘러들어 가슴께가 젖어들고 있다. 열쇠를 잃어버려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파트복도에 서 있다. 매니저는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어디 먼 곳으로 출타중인지 아무리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다. 애꿎은 담배만 벌써 다섯대 피우고 있다. 쓸쓸했다. 돈 떨어지니 여자도 떨어지고 집도 사라졌다. 등따시고 배부른 세월이 나에겐 참 어려운가보다. 비안개속으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날도 비가 왔었다. 중학교 2학년때였다. 기한을 훨씬 넘겨서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학교앞 오락실에서 같은 이유로 쫓겨난 친구와 오락을 했었다. 집에 가봤자 없는 돈이 생길 것도 아니고 파출부인 엄마에게 이야기해봐야 가슴만 아플 뿐 별다른 대책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날따라 오락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적군에게 묵사발이 되어 신나게 얻어터지고 땅에 뻗어버렸다. 오락실 앞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서 있을때 어디선가 어버지가 불쑥 나타났다.
“너 왜 학교 안 가고 그러고 있니?”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 노무자슥 없는 돈에 핵교 보냈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과 오락실에 들락거려.”
어디서 막대기를 하나 줏어 들고 사정없이 나를 두둘겨 팼다.
나는 말없이 맞었다. 억울했지만 비가 와서 일도 못나가고 낮술에 벌개진 아버지를 보니 불쌍했다.
보다못해 옆의 친구가
“기태 아버지 그만하세요.”
“등록금 못내서 쫓겨났단 말이에요.”
아버지는 갑자기 뻥뚫린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딴 아이들이 할아버지로 오해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 사십이 다 되어서야 겨우 결혼한 탓도 있지만 고생을 많이 해서 실제 나이보다 한참 늙어보였다. 공사장 인부였던 아버지는 소주를 좋아하셨다. 술힘으로 일한다시며 매일 술을 드셨다. 고랑처럼 패인 이마의 굵은 주름과 어쩌다 웃으실 때 보이는 누런 이빨들은 담뱃진에 찌들어 거무스레했다.
아버지는 그날 술을 많이 드셨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아무나 붙잡고 행패를 부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오시다가 지나가던 버스에 치여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고학을 하다싶이 간신히 고등학교를 나오고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먹고 자고는 몰라도 학비를 혼자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먹는 것, 자는 것도 해결하기도 벅찼다. 간신히 일년을 마치고 중퇴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오한이 났다. 당장 내일 이 넓은 엘에이에서 내 몸을 어디에 눕힐것인가가 문제이다. 코 앞에 닥친 먹고 자는 문제가 발등에 불처럼 타고 있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비릿한 비냄새에 퀴퀴한 쓰레기 냄새가 섞여 코를 자극했다.
“어디로 가야지?”
막막했다. 나를 미국으로 데려온 누나는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누나도 나처럼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 파견된 미군과 어찌 어찌 사귀어 태평양을 건넜지만 곧 헤어지고 이것 저것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돈 없고 기술없고 얼굴 반반한 여자가 먹고 사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쉽게 돈이 벌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자고 자존심만 세어서 돈은 많지만 몸만 밝히는 사내는 죽어라고 싫어했다. 이왕 그 길을 택했으면 얼굴에 주름살 지기전에 한 밑천 잡기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가. 쓰잘데 없는 생각이 구름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나밖에 없는 누나도 비빌 언덕이 아니었다.
‘사는게 뭐 별거 있냐.’ 중얼거려 보지만 여느때와 달리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5년전 아내와 낯선 미국에 올때만 해도 원대한 꿈은 아니지만 조그만 꿈은 있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은 아니라도 차도 사고 집도 사서 남들처럼 사람답게 오손도손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잔뜩 품고 비행기를 탔었다. 맨 손으로 와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때문이다. 꿈의 나라 미국은 그러나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었다. 맨 주먹 붉은 피밖에 없는 사람들이 성공하기가 한국과 다름없이 어려웠다. 밤청소, 가드닝, 노가다, 세탁소 뒷일, 창고정리, 광고세일즈 ,식당딜리버리, 택시드라이버 등등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돈을 저축 할 수 없었다. 서울이나 엘 에이나 도시의 인상은 비슷했다. 겉모습은 차라리 서울이 더 화려한지도 모르겠다. 그저 경찰 복장이 조금 다르고 시도 때도 없이 엥 엥 거리고 나타나는 불자동차가 좀 다를까, 돈만 있으면 구하고자 하는 건 다 구할 수 있는 것도 똑 같았다. 그리고 돈이 내 수중에 없다는 것도 같았다.
식당에 웨이츄리스로 일하던 아내는 식당에 들락거리던 손님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다.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항상 세상에 따귀를 맞고 사는 것 같았을뿐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에 북받치지는 않았다. 몹시 쓸쓸했을 따름이다. 텅빈 방에 혼자 들어설 때 훅 끼치는 냉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훨씬 현세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소화불량이라든가 내일 마감인 집세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변통할 가능성도 없다는 것, 여자가 그립다는 것 뭐 이런 것이아닐까.
석달째 집세를 못 내자 철거통지서가 어제 배달되었다. 일주일내에 방을 비우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내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복도에 다닥 다닥 붙은 문들 중에 하나를 열면 방이 나타난다. 식탁엔 말라비틀어진 생선토막과 물기가 날라 가서 겉잎이 쪼그라진 김치가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다. 여기 저기 말라 붙은 밥풀에 바퀴벌레들이 제 세상 만난 것처럼 어지러이 돌아다닌다. 소주를 들이키며 불도 켜지 않은 감옥같은 방에서 오두마니 앉아 비에 젖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내일이면 이 작은 방에서조차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렇게 살아 무엇하나, 벼랑끝에서 절벽아래를 내려다보는 심정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끝장이 날 인생이라면 우울하고 슬픈 일이다. 아니 억울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인간이 영원히 못 살고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이 차라리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당장 죽을 생각은 나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실행할 정열이 없기 때문이다.
한달 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 우연히 친구 영식을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에 다니냐고 해서 , 안 다닌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교회 장로가 되어 있었다.
그 친구가 교회에 한 번 나오라고 했다. 일요일에 할 일도 딱이 없고 많은 사람들이 도데체 왜 교회에 다니는 지 궁금해서 한 번 나가보기로 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중에서 자기는 모태신앙이라고 자랑 비슷하게 말하 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부모님 종교를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야한다고 배워왔다는 사실이 신앙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특별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조그만 회사의 영업부에 있었기때문에 매일 거래처 사람들과 술집이나 들락거리며 살았었다. 세상에 좀더 가까이 섞여보고자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친척중에서 충청도이모님이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셨는데 밤길을 혼자가도 무섭지 않노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났다. 교회에 다니면 사람들은 무섭거나 외롭거나 앞날이 막막할때 자기를 돌봐 주시는 위대한 분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속으로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었다.
성경구절중에서 인상깊은 구절이 몇 개 있기는 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까지 내 놓아라.’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벗어 주라.’ 기독교 교리중에 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라는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데 아랍사람에게 오른빰을 호되게 맞은 후 왼 뺨을 내 놓은 것 같지는 않다. 현실에서 적용이 어려운 교리는 아무리 내용이 아름답다해도 인간살이에서 별로 소용이 없는 게 아닐까?
아무튼 내일이면 집, 아니 방을 비워야한다. 어디로 갈것인지 아직 모른다. 홈리스가 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수입이 떨어지면 페이먼트를 못하고 그러면 집에선 쫓겨나고 차는 가져가 버린다. 하릴없이 마켓카트를 끌면서 여기 저기 쏘다니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나라고 별수 있으랴.
한인타운에서 한 반시간 서쪽으로 차를 몰아가면 벨리라는 동네가 있다. 그 중에서도 시미벨리라고 한적한 동네에 친구가 다니는교회가 있었다. 일요일, 샤워하고 옷 입고 차를 몰아 집을 나설때, 맑고 투명한 햇살이 하늘에서 바로 내리 쪼이는 것이 참 좋았다. 설교는 시시했다. 왜냐하면 체험이 담기지 않은 설교였기때문이다. 장님이 빛에 대해서 뭐라고 주절거리는 것처럼 듣는 사람에게 하품을 자아내게하는 설교였다. 사랑에대한 이론을 많이 안다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아니다. 진실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사랑에 빠져 보아야 된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이론과 예화를 많이 안다고 몸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목사님을 보고 싶었다. 몸소 불쌍한 영혼을 진실로 사랑해본 체험이 있는 목자가 이 시대에 있을까? 있기는 하겠지만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소문으로 밥퍼목사로 유명한 어떤 목사님이 한국의 청량리588 동네의 창녀들과 거지와 깡패들을 위해서 라면을 매일 끓였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가벼운 찬탄이 나오기는 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몸에서 나는 역한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보통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신수양이 잘되어도 냄새나는 거지 몸을 만지기는 싫어하는 게 평범한 인간인데, 그 목사님은 먹이고 입히고 목욕까지 시켰다지 아마. 참 굉장한 목사님이구나 생각했다. 그 냄새를 어떻게 견디었을까? 참 대단하구나. 쇼우맨쉽으로 라도 즉 유명해지기 위해서 견딜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유명해지고 싶어도 그런 것을 감수할 사람은 흔하지 않는 법이다.
비속에 우두커니 망연자실 서 있은지 한 시간은 족히 넘었을 때, 복도 가운데 방문이 하나 열렸다. 복도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옆 방의 잭이 술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다가왔다. 자기는 내일 라스베가스로 이사가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눈이 퀭하고 비쩍 마른 잭은 옆방에 살았는데 가끔 한숨소리와 우는 소리가 벽을 통해 들려오곤 했었다.
“나도 내일 떠난다.”
어깨를 서양사람처럼 약간 들어올리며 두 손을 내저으며 아무튼 고맙다고 했다.
“왜 거기 서있냐?”
“열쇠를 잃어버렸다.”
그러면 잠시 자기방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돌아서는 잭의 등어리에 라스베가스로 떠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쓸쓸한 모습이 겹쳐졌다. 언젠가 본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의 주인공과 그는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다.
살다보면 여러종류의 날을 맞이한다. 화창한 날,비오는 날,흐린 날,바람 부는 날- 쨍하고 해뜰날이 나에게도 찿아올까? 아내가 떠나고 나자 나쁜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줄지어 찿아왔다. 교통위반 티켓을 연속 두 번 받은 후 기어이 큰 사고가 났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좌회전 하다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차에 받혀 죽을뻔했다. 양쪽 에어백이 펑 펑 터지고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우째 이런 일이 나에게 자꾸 일어날까? 다행인 것은 몸은 다치지 않았다. 정신은 혼란스러웠지만 말이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 차가 없으니 문서딜리버리를 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차는 토탈데미지(total damage)로 판정되어 얼마간의 돈으로 되돌아왔다. 이혼과 실직과 사고로 이어지는 나날속에서 드디어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파트 메니져는 밤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오두마니 앉아서 멀거니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빗소리가 적막함과 외로움을 더해준다.
기도가 하고 싶었다. 나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다. 사면초가였다. 쳐다볼 방향은 하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도는 간단했다.
‘하나님, 내일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거리에 나앉기는 싫습니다. 저에게 방을 주십시요.’
방바닥에 널부르져 누워 있는데 전화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웬 전화지? 하며
“여보세요.”
“기운 좀 내라.”
내 목소리가 죽어가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친구뿐이다. 영식이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며칠 전에 방을 내줘야할 형편이라고 신세한탄 한 걸 마음에 뒀나보다.
짐 싸서 우선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요즘 세상에 마음씨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처음으로 한 기도가 금방 효과가 나타나니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친구 마누라의 눈치가 더 사나워지기전에 방을 구해야했다. 일간지 하숙,아파트란과 구인,구직란을 샅샅이 훑었다. 제일 싼 하숙집에 전화하여 언제 방문할 지 약속했다.
한인타운 올림픽거리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크렌셔라는 길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집이었다. 좀 퇴락하기는 했지만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게이트철문이 녹이 슬어 벌겋다. 마당에는 큰 개가 두 마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자 개들은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주인은 50대 아줌마였다.
“아,전화 주셨던 분이죠?”
“네.”
최대한 예의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복도였다. 그런데 복도 한 복판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대낮인데도 얼굴이 벌겋게 취해 있었다. 에이.좆같은 세상,어쩌고 하면서 나를 한 번 슥 훑어보고 지나간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미스터 김은 노름에 빠져 마누라가 도망가고 지금은 밤이고 낮이고 소주 없이는 살 수 없는 폐인이 된 사람이었다. 방은 복도의 끝에 있었다.
‘빈 방이 하나밖에 안 남었어요.’ 방문을 열며 주인이 활기차게 말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방이 생각보다 너무 좁고 작았다. 겨우 한 사람이 눕고 책상과 의자가 간신히 들어갈 공간밖에 없었다. 오래 비어 있었는지
싸늘하고 퀴퀴한 냄새가 묻어나왔다. 선뜻 들어서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식사는 어떻게 하지요?”
“따라 오세요.”
주인 아줌마가 ‘요’자를 길게 빼면서 앞서 걸어나갔다. 복도를 벗어나 이층으로 올라가자 6인용 식탁과 대형 전기밥솥이 놓여 있었다. 주인은 보란듯이 밥솥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오래 된 듯한 밥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반찬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꺼내 먹으세요. 그리고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시간을 꼭 지키시구요. 공용 화장실과 욕실, 역시 공용의 세탁기가 있는 곳도 안내 받았다.
며칠 후 이사했다. 이사라기보다 이동이었다. 식탁이며 소파- 헤어진 아내가 산 꽃무늬 소파-는 그대로 두고 나왔기 때문에 짐이라곤 큰 가방 두개에 책 보따리 몇개가 전부였다. 짐을 옮긴 후 친구가 말했다.
“괜찮은거니?”
“괜찮아.” 나는 대답했다. 친구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친구는 가기전에 성경책과 봉투를 하나 두고 갔다.
봉투속엔 돈과 편지가 있었다. -살다보면 골짜기를 만나기도 한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기 바란다. 구약의 욥기를 꼭 읽어보게. 그리고 교회에 꼭 나와라.-
영식이는 마음씨가 고운 아이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일학년때다. 숙제를 못해간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성질이 사납고 별명이 ‘미친갱이’ 인 수학선생은 다른 건 몰라도 숙제를 안 해 온 학생에게는 사정을 두지 않고 미친듯이 때리는 벌을 내렸기때문이다. 전날 인쇄소에서 밤샘일을 한 나는 숙제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슬며시 내 책상위에 자기노트를 올려 았다. 영식을 제지할 틈이 없었다. 물론 영식은 학교생활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구타를 당했다.
영식은 그런 아이였다. 바보같이 착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영식이 아버지는 달랐다. 영식이 아버지는 농부였다.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기전에 말죽거리에 채소밭을 일구어 생계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돈벼락을 맞았다. 70년대 부터 강남개발붐이 일자 영식이 아버지의 논밭이 갑자기 금싸라기땅이 되어버렸기때문이다. 소위 벼락부자가 된 영식이 아버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게할 정도로 빠르게 변모했다. 그는 영식이가 다니던 교회에는 물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의 도리를 알 리도 없었고 즐겨하지도 않았다. 밤마다 룸사롱을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돈을 물쓰듯 썼지만 금고에 돈은 점점 늘어만갔다. 지금도 말죽거리 사거리에 10층짜리 빌딩을 비롯하여 서울 곳곳에 부동산과 전국 요소 요소에 사둔 땅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라만 가기때문에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여전히 잘 살고 있다고 영식이 전해 주었다.
봉사단체에서 성금을 요구하면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 며 외면했다. 그런 아버지였다. 그런데 영식이는 돌연변이였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있는대로 주었다.
친구가 돌아가자 방으로 돌아왔다. 좁고 누추한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욥기를 읽었다. 착한 욥은 사단의 악의로 부귀와 명예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몹쓸병에 걸렸다. 친구들이 찿아와서 위로대신 죄를 회개하라고 한다. 죄때문에 재난이 찿아왔다고 고난과 시련에 빠진 욥을 괴롭힌다. 인간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다. 반대로 고난에 빠지면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산전수전 겪어본 경험으로 언젠가부터 깨달은 것이다.- 죄때문에 걸리는 게 병이라면 도둑이나 사기꾼이 감기약을 먹으면 낫지 않아야 되는데, 그들도 감기약을 먹으면 낫기도 하는 것같다. 욥의 이야기는 실직과 이혼과 거듭되는 사고로 엉망이 된 몸과 마음에 위로가 안되었다. 대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부귀와 명예, 건강 이런 것을 사람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목록이다.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것은 신의 저주때문이라는 생각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소위 팔자라는 것이다. 너가 지금처럼 못 살고 고생하는 것은 운명때문이라는 사상을 심어줄려고 예부터 무던히 애쓰는 계층이 있었다. 그래야 자신들의 행복이 보장이 되기때문일까? 내 생각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란 부모이다. 왜냐하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기때문이다. 어떤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인가가 그 아이의 운명을 절반이상 결정해버린다. 부모의 형질과 사회,경제적 환경이 어린 아이의 운명이 아닐까,적어도 철이 날 때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태어난 시대와 장소가 다른 것을 결정해버린다. 하루살이 생명이 불행하게도 태어난 날이 비오는 날이었다면 하루종일 비맞고 저 세상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이 아니고 재수없게 평양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위대한 수령 어쩌고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아무튼 이런 생각은 인간의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삶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사상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합격발표때만 되면 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기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청소부이고 어머니는 파출부인데 그 어려운 형편에 주경야독하여 고시에 패스한 자랑스러운 고학생의 사진이 자주 실리곤했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고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를 피울 수 있고,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다. 머리가 좋지 못하고 강한 욕망과-꼭 성공하리라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어금니 꽉 깨물지 못한 개인의 잘못이라는 것-지금 가난하고 퀴퀴하고 좁은 방에서 이렇게 업드려 사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이 시대는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시대인 것 같다. 끊임없이 인간의 시선과 의식을 유혹하는 물질 소비시대이다. 물질을 소비하려면 돈이 있어야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은 백화점과 상점마다 가득찬 상품이 요염하게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어느 잡지에 실린글이 생각난다. 현대의 행복한 얼굴은 백화점 앞에서 양 손에 주체할 수 없이 옷이며 물건을 잔뜩 사든 여인의 얼굴이라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허용된 제한된 행복이라는 것이 최대의 단점이지만-부질없는 생각이다. 지금의 나에겐 현실적으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내일 부터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신문의 구직란에서 내가 할만한 일을 찿아서 헤맨지 달포가 지났다. 차가 없어서 가까운 한인타운의 업소를 중심으로 발에 땀이 나게 돌아다녔다. 번번이 거절당하자 기운이 쭉 빠졌다. 힘들고 더럽고 남들이 하기 싫은 일조차 나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친구가 준 돈을 다 털어서 소주를 샀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한 잔 또 한 잔 독약을 털어넣듯 마셨다. 답답했다. 미칠 것같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볕에 타고 찌들어 거무튀튀한 얼굴과 더듬거리는 말투와 소눈같이 착한 눈에서 흘리던 눈물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소주 3병을 마시자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나는 악을 썼다. 술병을 있는 힘을 다하여 던지자 퍽 소리를 내고 병은 깨졌다.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높고 긴 벽이 나를 가로 막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벽을 넘어 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벽을 두드리고 주먹을 치고 머리를 부딪혔다. 기진맥진해서 벽 앞에 널부려졌다. 어느덧 나는 풀한포기 없는 벼랑끝에 서있다. 벼랑에 서 내려다 본 절벽아래 푸른 물이 넘실거린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보다 일찍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편안했다. 그런데 땅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았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라, 아들아’ 눈을 뜨자 휘황한 빛이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분이 공중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흠칫 놀라 일어났다. 방안은 여전히 어둡고 싸늘했다. 깨어진 유리병 조각이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냉수를 한 컵 마시고 시계를 보니 새벽5시 였다. 욥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어떻게 견디었을까. 부귀와 명예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온 몸을 갉아먹는 욕창에 시달리고 태어난 날을 저주 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믿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믿은 사람, 그의 아픈 마음이 내 마음에 젖어들었다.
며칠 후 친구가 찿아왔다. 그동안 일때문에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열쇠를 하나 주었다. 이게 뭐냐고 하니 자기가 타던 차열쇠인데 ‘형편이 풀릴 때까지 타라’고 했다. 일자리도 하나 알아봤다고 했다. 기운내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했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손바닥에 전해왔다. 돌아서는 친구의 뒷모습에 언뜻 휘황한 빛이 보였다. 내 눈이 잘못되었나 하고 눈을 비벼 보았다. 분명 친구의 몸 근처에 밝은 빛이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하늘을 향한 내 마음의 빗장이 슬몃 열리는 듯했다.
11-12-05. 백남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