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윤상 시인의 한시(漢詩)세계

by 김우영 posted Feb 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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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윤상 시인의 한시(漢詩)세계




           내면의 울림, 그리고 한시(漢詩)로의 유혹

          언제나 변함없는 고려청자 같은 난향 (蘭香)




                                        김우영(작가. 한국문인협회. 대전광역시 중구문학회 사무국장)




1. 들어가는 말




가. 한시(漢詩)에 대하여



한시(漢詩)란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시가(詩歌)양식에 따라 지은 문학작품이다. 이것을 자국어문(自國語文)으로 된 시가와 구별하여 부르기도 하며 통속적으로는 중국의 전통적인 시가 문학까지를 포함해서 한시의 영역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이다. 근대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종래의 국문(國文)과 한문에 의한 2원적인 어문생활이 국문으로의 단일화 방향으로 진행되어 국문시가 그 주체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지금까지의 한문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나. 한시(漢詩)의 개념



좁은 의미에서는 한대(漢代)의 시를 이르지만, 넓은 의미로는 중국과 주변의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로 쓴 시를 포함한다.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발달했던 당나라 이후의 한시를 근체시(近體詩), 그 이전의 시를 고체시(古體詩)라 한다.



다. 우리나라 한시의 발달



고대에서 한문학은 삼국의 건국 이전 전래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한문으로 시문(詩文)과 기사문(記事文)등을 지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신라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등은 중국과의 투쟁과 교류를 계기로 지어진 작품들이다.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도가 실시되면서 한시의 창작이 귀족의 일반적 교양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도 왕조의 중요한 사상적 구실을 하도록 했으며, 한문학의 문체는 고문(古文)이 성행하였다. 후기에는 도학파(道學派)와 사장파(詞章派)가 대립하는 가운데 이인로, 이규보 등과 같은 사대부의 독창적인 문체와 표현을 통해 발전하였다.




조선에서는 유교를 국시로 숭상하였다. 학행일치(學行一致)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어 순수한 서정적 한문학과 대립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 이후의 도학(道學)과 사장(詞章)의 대립은 선초에도 조광조와 남곤으로 대표되는 논쟁으로 이어져 결국 사장파의 독립을 가져 오게 되었고, 이후 순수 문학의 형태로 성장 발달하였다.



라. 한시의 종류



한시의 종류에는 고체시(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가 있는데 고체시는 당(唐)나라 이전의 한시이다. 형식이 자유롭다. (詩經, 楚辭, 古詩, 樂府) 또 근체시는 당(唐)나라 이후의 한시이다. 시의 형식이 자유롭지 않다. (<五, 七言> 絶句詩, 律詩, 排律詩)



2. 한 마리 학(鶴) 같은 선비를 만나




근대문학사 시학(詩學)의 흐름은 현대시 대표주자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난해시 등 다양한 형태의 시의 유형이 나타나 시류의 난맥상을 이루고 있다. 시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요즘시는 어렵다고 하기도 하고 시의 내재속에는 도대체 어떤 메타포(metaphor)를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를 공부하고 안다고 하는 문인들도 이런 상황일진데, 시와 거리가 있는 독자들이 시를 접근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이러한 시기에 '한시(漢詩)'라는 고풍스런 시를 들고 나타난 선곡(仙谷) 전윤상 시인의 등장은 한 줄기 청량제요, 즐거운 선물이다.




현대시의 둥장으로 인하여 자칫 뒤켠으로 잊혀져가는 이때에 선곡의 한시 시집 발행은 마치 한 마리 학(鶴)과 같은 고고한 선비의 학풍으로 사뿐히 날아와 앉아 우리에게 높은 이상(理想)과 꿈을 안겨주는 횡재요,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선곡 전윤상 시인은 1946년 충남 아산 선장의 양반가 선비집안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유학을 간 한양학파이다. 대학 졸업 후 평소 뜻한 바 있어 1970년대에 교육계에 투신하여 40여년의 성상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후학들을 가르쳐 이 나라와 사회의 간성으로 육성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배려로 일찌기 천자문(千字文)을 들고 서당(書堂)을 출입한 덕분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사십대 중반에는 저 유명한 퇴운(退雲) 이지풍(李之渢) 선생에게 사서(四書)와 시전(詩傳)을 배워 본격적으로 한학에 눈을 떴다.




이때부터 선곡은 자연스럽게 한시(漢詩)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시나브로 시심(詩心)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교직생활과 국내외 여행을 통해서 세상과 자연풍광을 접하며 떠 오른 단상들을 틈틈이 기록하여 한시를 써 놓았다.




이런 오랫동안의 갈고 닦은 한시풍의 기량으로 지난 2000년 10월 6일 남간정사 백일장 한시부분 차상 수상을 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는 2007년 8월 31일 38년의 교직을 명예퇴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퇴직 후 그간 쓴 한시와 여행, 일상의 시들을 모아 드디어 이번에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3. 칠언율시(七言律詩) 극치의 아름다움




한시에는 (律詩)가 있다. 2, 4, 6, 8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는 경우도 있다. 또 칠언율시가 있는데 1, 2, 4, 6, 8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곳에서 대구법(對句法)은 한시(漢詩)에 있어서 많이 쓰는데 두 구(句)가 상대(相對)되거나 상응(相應)되는 구(句)로 구성하는 법이다. 공통점은 ① 글자 수 가 같다. ② 문장성분의 배열이 거의 일치한다. ③ 문장의 해석 순서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절구(絶句)는 기구(起句)와 승구(承句)가 대(對)를 이루거나, 전구(轉句)와 결구(結句)가 대(對)를 이룬다. 율시(律詩)는 3구(句)와 4구(句)가 대(對)를 이루거나 5구(句)와 6구(句)가 대(對)를 이룬다.




한시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절구시(絶句詩)가 압권(壓卷)이다. 칠언절구는 1, 2, 4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오언절구는 2구와 4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도 붙이는 경우도 있다.



아래의 시는 선곡이 남간정사(우암사당) 한시(漢詩) 백일장에서 영예의 차상을 수상한 남간정사(南澗精舍)란 작품이다. 함께 감상해보자.




天降斯翁 輔世長 (천강사옹 보세장)

淸光南澗 愛吾鄕 (청광남간 애오향)

謀猷征北 千秋業 (모유정북 천추업)

密札綸音 御墨香 (밀찰륜음 어묵향)

閑聖距詖 非好辯 (한성거피 비호변)

兼夷驅獸 一治眶 (겸이구수 일치광)

蜉蝣撼樹 何日歇 (부유감수 하일헐)

遺德如今 不敢忘 (유덕여금 불감망)


                                               韻 : (長 鄕 香 眶 忘)


                                                        - 시 '남간정사(南澗精舍)' 원문




하늘이 이 어르신을 내시어 세상을 도모한지 오래 되었고

맑은 풍광의 남간사는 사랑스런 나의 고향 같구나

북벌계획을 꾀한 것은 천추(한이 맺힌)의 사업이요

비밀리에 임금과 독대 숙의 한 것은 임금님의 묵향(신임)이라

성스러움을 돕고 헐뜯는 것을 멀리하여

好辯(호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겸하여 오랑캐 짐승 같은 무리 내몰아

한 번 다스려 바르게 함 인데

큰 뜻 모르는 하루살이들 나무를 흔드는데 언제나 잠잠해질까

遺德이 요즈음까지 이르렀는데 감히 잊지 못하노라.




압운(押韻)과 운자(韻字)와 절구(絶句)의 대입이 극치를 이루며 선경(仙境)에 이른 작품이다. 이것이 선곡 전윤상 시인만이 갖고 있는 한시 내면에 울림이요, 우리를 가능하게 하는 유혹의 시장이다.




4. 칠언절구(七言絶句)의 매력




다음에는 선곡(仙谷)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살펴보자 . 한시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절구시(絶句詩)가 압권(壓卷)이다. 칠언절구는 1, 2, 4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오언절구는 2구와 4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도 붙이는 경우도 있다.

                        



                          古宮遺跡 多在京 (고궁유적 다재경)

五輪體典 益分明 (오륜체전 익분명)

南山登塔 觀夜景 (남산등탑 관야경)

地上銀河 可作名 (지상은하 가작명)

                                                                        - 시 '登 南山(서울 남산에 올라)' 전문




고궁 역사유적은 서울에 많이 존재하고

오륜체전(올림픽)이 그 명분을 더하였다

남산타워(탑)에 올라 야경을 관망하니

지상의 은하수라고 작명함이 좋겠네




선곡 시인은 자신이 알토란 같은 젊은시절 유학와 학문을 구가하던 서울땅 남산에 올라 시내야경에 취한다. 가히 이를 보고 선곡 시인은 '지상은하 가작명(地上銀河 可作名)'이라하여 '지상의 은하수라고 작명함이 좋겠다'고 절묘하게 표현 한시의 울림에 미학(美學)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선곡(仙谷)다운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절창인가!




5. 함께하는 仙谷의 한시 여행



아래는 선곡이 계룡산을 다녀와 쓴 자연스런 한시이다. 감상해보자.




옥처럼 맑은 물

비류(飛流)하는 은선폭포(隱仙瀑布)

기암절벽 수려한 절경

신선이 숨어 살 만 한 곳

절벽 위에서 곡예 하듯

의연하게 서있는 소나무

온갖 잡목과 녹음이 어우러지고

푸른 이끼 덮인 폭포 벽 사이에는

철쭉 꽃 흐드러져 산수와 조화되어

자연이 자아내는 흥취를 더해주네

관음봉과 삼불봉 사이

시원한 바람이 좋다

                                                      - 시 '계룡산에서' 전문




선곡 자신의 동향이기도한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을 다녀와 감동에 젖어 쓴 시이다. 여기에서 이 시에 압권은'비류(飛流)하는 은선폭포(隱仙瀑布)/ 기암절벽 수려한 절경/ 신선이 숨어 살 만 한 곳' 이다. 그야말로 명시요, 명주실로 잘 뽑아낸 절창이로고 . . . . . . !




그리고 아래의 시는 선곡이 중국의 계림을 방문하여 쓴 시이다. 함께 보자.




예쁘게 솟아 오른

여성스런 봉우리

영겁의 세월이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가고

유유히 흐르는

이강(漓江)의 맑은 물로

마음의 때를 벗기고

속세의 번뇌를 씻을 수는 없을까


운무로 가려진 산허리

하늘이 조각한 대자연

동양화를 감상하는

황홀한 기분

산의 정기에 흠뻑 취하여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은

산수의 오묘한 까닭인가

호연지기가 꿈틀 거린다

뱃머리를 돌릴 때마다

숨은 비경을 스치는

기가 막히는 풍경

진정 천하의 산수로다

여기가 어디 메요!

선계(仙界)인가! 제향(帝鄕)인가!

이 강이 이강(漓江)이고

요 산이 요산(樂山)이다



                                                        - 시 '계림(桂林)에서' 전문




이 시에서도 선곡의 시를 뽑아내는 유려한 솜씨가 돋보인다. '선계(仙界)인가! 제향(帝鄕)인가!/

이 강이 이강(漓江)이고/ 요 산이 요산(樂山)이다/ 라는 대목이다. 평생을 한학으로 다져진 선곡의 눈에 비친 계림의 선계(仙界)인가! 제향(帝鄕)이 이강(漓江)이고 요 산이 요산(樂山)이라고 대단원을 짓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시의 언어를 유희할 줄 아는 노련미고 돋보인다. 한시를 오래 쓴 분이라서 그런지 율조가 유유하다. 그래서 선곡(仙谷)이요, 선시인(仙詩人)이 아니던가!





6. 효부는 효자를 낳고




효부집에 효부난다고 했던가! 선곡은 선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천상 효부요, 천상 효자이다. 시집 종장에서 '天上에 계신 先考시여!' 라는 제목의 글을 보고 평자(評者)는 눈물이 글썽이었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리며 애절하게 쓴 글은 마치 눈물로 찍어 쓴 글 같다. 아버님을 선고(先考), 어머님을 선비(先妣)라 존칭하며 구구절절 효자의 심성을 알현케 한다.




애절한 편지의 서두에서 '황소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저승길을

어떻게 지나 가셨나이까? 가시밭길 헤치시느라 염습시(時)에 끼워드린 장갑도 성치 못하시지요?

먼저 길 떠나신 학과 같은 청아한 모습의 先妣는 만나셨나이까?' 에서 차마 눈길을 떼지 못하고 평자(評者)는 눈시울을 붉혔다. 평자(評者)도 지난해 가을 팔순의 노모를 여위는 아픔을 겪었기에 동병상련의 슬픔을 느꼈다.




7. 다반사(茶飯事)처럼 한시를 마시며




우리나라의 한시학문은 삼국시대 말엽에 발생하여 통일신라시대 때 성행하다가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고려 초까지 존재하였던 한국 고유의 정형시가(定型詩歌)로 불리는 신라의 향가(鄕歌)와 시가문학에 대한 구송성(口誦性)의 음악성을 지닌 고려의 가요(歌謠)와 한국 교유의 정형시로 일컫는 조선의 시조(時調)로 거쳐 왔다.




이처럼 한시(漢詩)는 다반사(茶飯事)란 말처럼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상과 같이 우리의 희로애락과 함께 했다. 작게는 가정사, 넓게는 세상사의 희로애락을 한시에 담아 다반사처럼 시를 마시며 읊조렸다.




그러던 것이 조선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시는 쇠락해졌다. 한때는 구 시대의 유물정도로 취급받으며 현대시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늘에 갇혀있는 것이 한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 대학의 교수들이나 선곡(仙谷) 전윤상 시인 같이 뜻있는 시인들의 한시 발표로 인하여 고려청자처럼 옛 선비의 울림에 미학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한시는 언제나 변함없는 고려청자처럼 난향(蘭香) 그윽한 내음으로 우리 내면의 울림, 유혹의 손짓으로 시나브로 다가온다.




조선중기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권필(權鷝)이나 송강정철의 장진주(將進酒)나 고려의 시인 이색(李穡)이나, 허균(許筠), 장약용(丁若鏞)등이 대표적으로 한시를 사랑했던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시인이었다.




우리 한시의 아름다운 시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이 들어있는 성종 1478년 때 편찬한 시문선 동문선(東文選)에 보면 고려조 문신 정지상(鄭知常)의 '임을 보내며(送人)를 소개하며 선곡(仙谷) 전윤상 시인의 작품해설을 접는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派(별루년년첨록파)



비 갠 긴 둑에 풀빛 짙어지는데/ 남포에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일렁인다/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다 마르리오/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 보태는 것을. . .




                               기축년 춘삼월 호시절을 맞으며




                                  대한민국 중원땅 문인산방에서

                                     나은 길벗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