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성(無償性)에 굴하지 않는 문학
-이숭자 선생님을 추모하며
아주 오래전에 읽은 솔 벨로우의 <훔볼트의 선물>이란 소설이 있다. 솔 벨로우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델모어 슈왈츠와 솔 벨로우 자신을 모델로 썼다는 이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대충 기억하기 때문에 다소 다를 수가 있음을 용서하시라.) 화자인 찰리 시트린(솔 벨로우)은 어느 날 시인 훔볼트가 싸구려 모텔 방에서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훔볼트는 젊은 날 문학 지망생이었던 시트린의 우상으로서 예술적 광채가 넘치는 천재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를 개탄하며 인간 정신의 우월성만을 믿고 비타협적으로 활동하여 급격히 문단과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시트린은 이러한 자신의 정신적 우상이었던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따른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 충실한 작품 활동으로 문단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가다가 드디어는 작가로서의 명예와 부를 동시에 달성한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은 시트린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내와의 불화가 찾아오고 시트린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갱단의 음모에 말려들면서 그의 삶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벼랑 끝에 몰린 인생의 위기에서 시트린은 젊은 날 이해하지 못했던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한 스승인 훔볼트의 가르침을 기억해내고 스승의 가르침이 커다란 정신적 유산으로서 그에게 새롭게 부활한다.
예술적 성공과 인생의 실패라는 저 풀 수 없는 딜레마를 주제로 다룬 소설은 사실 이 소설이 처음은 아니다. 고갱을 모델로 한 서머셋 모음의 유명한 <달과 6펜스> 또한 천재적 예술가와 양립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을 파헤친 작품이다. 소설은 아니지만 고은의 이중섭 전기 또한 자신의 삶을 파멸시켜가는 위대한 예술가의 비극을 냉혹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이런 주제의 소설이나 전기를 읽다 보면 작가가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쓰는 것과 작가로서의 성공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지난 1월 22일 한국의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40세의 늦깎이 나이로 등단하여 고희를 넘기고도 문학성이 높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한 선생님의 장례식에는 대통령의 문화훈장 추서와 함께 수많은 인파의 추모객이 몰렸다. 같은 날 엘에이의 한 양로병원에서는 97세의 한 노인이 외롭게 생을 마감하였다. 뒤늦게 친지들에 의해서 이 분이 평생 문학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던 이숭자 시인이라는 것이 알려졌지만 이곳 언론의 부고란에 짧은 한 줄의 지면을 얻는데 그쳤다.
사후에 영광스런 유명 문인의 장례와 이름이 거의 잊혀질 뻔한 문인의 쓸쓸한 죽음과 비교되면서 불현듯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솔 벨로우의 <훔볼트의 선물>이 생각났던 것이다.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이숭자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 분이 1946년에 김달진, 유치환, 박목월, 이호우 시인 등과 시잡지 죽순동인으로 활동하셨고 1954년에는 첫 시집, '호심의 곡'을 출간하신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원로시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숭자 시인은 <훔볼트의 선물>에 나오는 훔볼트처럼 실패한 삶을 산 시인이 아니다. 그녀는 49세인 1959년에 도미하여 만학으로 주립대 석사학위까지 받고 소셜워커로서 일하다 1973년 은퇴하였고 자식과 손자들은 줄줄이 하버드대를 졸업하여 당당한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한 성공한 이민 일세의 전형이다. 도미 후 30년 동안 이처럼 이민자로서, 싱글 맘으로서, 생업과 자녀 교육에 힘쓰느라 문학을 접어놓으셨던 선생님은 훗날 자신이 한국에서는 작고 시인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다시 시를 쓰셨다고 한다. 그리고 32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새벽하늘(1986)>을 발표한 후 <국경의 제비>(1988) <사랑의 땅>(1989), <빛따라 어둠따라>(1990), <일어서는 파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오랜 휴지기를 끝내고 분출하는 활화산처럼 맹렬히 불타오르는 문학적 열정을 토해내셨다.
이숭자 선생님이 실패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같은 날 본국에서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의 성대한 장례식과 비교되면서 이숭자 선생님처럼 이곳에서 문학을 하려는 나로서는 묘한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땅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고도에 유배된 자의 넋두리가 아닐까? 찹찹한 마음에 그날 밤 나는 밤늦도록 인터넷 이곳저곳에서 귀하게 얻은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아래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숨가쁜 고착은 거부했다.
신.발 신발은
해뜨면 지렛대로 날 세우고 나서고
해지면 고요히 안식의 여백으로 남아
쪽배 하나 띄울 강물도 없는 다리 아래
좌우 이란성 쌍둥이 입벌린 공간
일찍이 내 요람의 첫걸음에서
다섯 발가락 가난처럼 한 방에 들어
오밀조밀 문신처럼 자서전을 새겼다.
사랑과 미움으로
땀과 눈물로
오래도 왔다.
멀리도 왔다.
오늘 무릅뼈 사각거리는 일모의 언덕에 서면
내 키는 어떤 징후로 0.5센티 줄어져도
너만은 줄곧 시퍼런 나의 20대
7문반의 치수를 고수하나니
신.발 신발
나의 시퍼런 수치여.
<사랑의 땅> 중 ‘불변의 수치’ 전문
팔순이 다 되어 쓴 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과 뜨거움이 느껴졌다. 위의 예를 들 한 편의 시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상에 몇 편 안되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한편 한편 예사롭지 않은 노시인의 마지막 불꽃같은 혼신을 다한 열정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올라 잠시 멍멍해졌다. 순간 머리를 쿵 하고, 죽비를 한 대 얻어맞았다.
뒤늦게 찾아오는 문학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으로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글을 쓰는 우리로서는 박완서 선생님보다는 이숭자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우리들의 우상이 아닐까? 댓가를 바라지 않는 문학의 길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길일지도 모른다. 무상성에 굴하지 않는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인의 길일지도 모른다.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인 중 단 1%도 안 되는 소수의 문인들만이 이름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무명의 문인들로서 잊혀지는 냉정한 문학계의 현실 속에서, 열심히 쓰다가 잊혀져간다면 그 또한 수많은 무명의 선배 문인들의 길을 따라가는 영광스런 길이 아닐까? 어쭙잖은 글로 본국의 문단에 연을 대려고 기웃거리는 것보다는 과감히 이 땅에서 무명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또 한편 이숭자 선생님은 이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이 결코 자기과시나 자기만족의 유희가 아님을 보여주셨다. 아래의 시를 보자.
내 펜은 몽글어진 송곳이다.
내 책상은 쓰러져가는 다리다.
백지장은 내 앞에서 너덜너덜 여위어간다.
꽃병은 이미 무너졌다.
내 손은 낡은 넝마 장갑이다.
내 눈은 장님의 안경테다.
내 귀는 이상물질 들어간 보청기다.
내 코는 꽃가루 없이 사철 엘러지 환자다.
내 방에는 창문이 없다.
모조리 질식했다.
저 검은 손이
하루의 푸른 공단 오존 이불 한복판에
와지끈 큰 구멍 하나 무작히 뚫어놓고
몰래 내려와 내 작은 벽을 뚫고 들어왔나
내 두뇌에 녹두벌레만한 구멍 뚫었나
상처가 아물 피 찌거기도 말랐다.
매미떼가 벗어놓고 간 껍질처럼
낱말, 낱말이 수두룩히 곯아 떨어졌다.
내 시는 죽었다.
내가 죽었다.
<사랑의 땅> 중 ‘낱말이 질식했다.’ 전문
단 한 명의 독자가 읽어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수한 낱말들을 죽이며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문장과의 투쟁임을 보여주셨다.
미주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상성에 두려워하지 않는 문학, 그리고 자칫 글 쓰는 자의 자만심으로 빠지기 쉬운 자기만족의 문학을 경계하고 한자 한자 시어들을 깎아나가며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글을 쓰셨던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미주문인의 영웅이었다. 또한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미주 문학의 정체성을 인식한 시인이었다. 20년 모문학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국에 살아오는 동안 ‘나’라는 한 사람이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발로 이 땅을 밟고 스치고 지나간 많은 인종들, 그들과 함께 어울려 행복한 조화의 삶과 값진 새 문명을 함께 어깨를 나누는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여긴 한국문학과 달라야 됩니다. 여긴 바로 우리들의 현장문학이 싹터야 돼요.”
이러한 선생님과 더불어 송상옥 선생님, 고원 선생님 등 문학의 불모지에서 개척자적 자세로 미주 문학을 개간하셨던 선배들의 열정으로 90년대 한때 미주 문학은 “한국 문학의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다.”는 타이틀로 본국지에 기사가 나갈 정도로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숭자 선생님이 내리친 죽비에 밤새 얼얼해 있다가 다음 날 내가 속한 글마루 문학회의 몇 분들과 상의하여 간소하나마 이숭자 선생님 추모 문학회를 열어보는 것이 어떨까 상의하였다. 인연이 닿은 탓인지 글마루의 정해정 회장님은 평소에 고인께서 가장 아끼는 후배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정해정 회장님께서 이숭자 선생님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발표를 준비해주시겠다고 한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훔볼트의 선물>에서 주인공 시트린은 뒤늦게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위대한 스승을 추모하지만 내게는 올해 이숭자 선생님과의 뜻밖의 만남이라는 소중한 유산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숭자 선생님을 통해 작가는 잊혀져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치열하게 글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는, 작은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숭자 선생님을 추모하며
아주 오래전에 읽은 솔 벨로우의 <훔볼트의 선물>이란 소설이 있다. 솔 벨로우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델모어 슈왈츠와 솔 벨로우 자신을 모델로 썼다는 이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대충 기억하기 때문에 다소 다를 수가 있음을 용서하시라.) 화자인 찰리 시트린(솔 벨로우)은 어느 날 시인 훔볼트가 싸구려 모텔 방에서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훔볼트는 젊은 날 문학 지망생이었던 시트린의 우상으로서 예술적 광채가 넘치는 천재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를 개탄하며 인간 정신의 우월성만을 믿고 비타협적으로 활동하여 급격히 문단과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시트린은 이러한 자신의 정신적 우상이었던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따른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 충실한 작품 활동으로 문단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가다가 드디어는 작가로서의 명예와 부를 동시에 달성한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은 시트린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내와의 불화가 찾아오고 시트린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갱단의 음모에 말려들면서 그의 삶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벼랑 끝에 몰린 인생의 위기에서 시트린은 젊은 날 이해하지 못했던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한 스승인 훔볼트의 가르침을 기억해내고 스승의 가르침이 커다란 정신적 유산으로서 그에게 새롭게 부활한다.
예술적 성공과 인생의 실패라는 저 풀 수 없는 딜레마를 주제로 다룬 소설은 사실 이 소설이 처음은 아니다. 고갱을 모델로 한 서머셋 모음의 유명한 <달과 6펜스> 또한 천재적 예술가와 양립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을 파헤친 작품이다. 소설은 아니지만 고은의 이중섭 전기 또한 자신의 삶을 파멸시켜가는 위대한 예술가의 비극을 냉혹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이런 주제의 소설이나 전기를 읽다 보면 작가가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쓰는 것과 작가로서의 성공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지난 1월 22일 한국의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40세의 늦깎이 나이로 등단하여 고희를 넘기고도 문학성이 높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한 선생님의 장례식에는 대통령의 문화훈장 추서와 함께 수많은 인파의 추모객이 몰렸다. 같은 날 엘에이의 한 양로병원에서는 97세의 한 노인이 외롭게 생을 마감하였다. 뒤늦게 친지들에 의해서 이 분이 평생 문학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던 이숭자 시인이라는 것이 알려졌지만 이곳 언론의 부고란에 짧은 한 줄의 지면을 얻는데 그쳤다.
사후에 영광스런 유명 문인의 장례와 이름이 거의 잊혀질 뻔한 문인의 쓸쓸한 죽음과 비교되면서 불현듯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솔 벨로우의 <훔볼트의 선물>이 생각났던 것이다.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이숭자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 분이 1946년에 김달진, 유치환, 박목월, 이호우 시인 등과 시잡지 죽순동인으로 활동하셨고 1954년에는 첫 시집, '호심의 곡'을 출간하신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원로시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숭자 시인은 <훔볼트의 선물>에 나오는 훔볼트처럼 실패한 삶을 산 시인이 아니다. 그녀는 49세인 1959년에 도미하여 만학으로 주립대 석사학위까지 받고 소셜워커로서 일하다 1973년 은퇴하였고 자식과 손자들은 줄줄이 하버드대를 졸업하여 당당한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한 성공한 이민 일세의 전형이다. 도미 후 30년 동안 이처럼 이민자로서, 싱글 맘으로서, 생업과 자녀 교육에 힘쓰느라 문학을 접어놓으셨던 선생님은 훗날 자신이 한국에서는 작고 시인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다시 시를 쓰셨다고 한다. 그리고 32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새벽하늘(1986)>을 발표한 후 <국경의 제비>(1988) <사랑의 땅>(1989), <빛따라 어둠따라>(1990), <일어서는 파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오랜 휴지기를 끝내고 분출하는 활화산처럼 맹렬히 불타오르는 문학적 열정을 토해내셨다.
이숭자 선생님이 실패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같은 날 본국에서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의 성대한 장례식과 비교되면서 이숭자 선생님처럼 이곳에서 문학을 하려는 나로서는 묘한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땅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고도에 유배된 자의 넋두리가 아닐까? 찹찹한 마음에 그날 밤 나는 밤늦도록 인터넷 이곳저곳에서 귀하게 얻은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아래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숨가쁜 고착은 거부했다.
신.발 신발은
해뜨면 지렛대로 날 세우고 나서고
해지면 고요히 안식의 여백으로 남아
쪽배 하나 띄울 강물도 없는 다리 아래
좌우 이란성 쌍둥이 입벌린 공간
일찍이 내 요람의 첫걸음에서
다섯 발가락 가난처럼 한 방에 들어
오밀조밀 문신처럼 자서전을 새겼다.
사랑과 미움으로
땀과 눈물로
오래도 왔다.
멀리도 왔다.
오늘 무릅뼈 사각거리는 일모의 언덕에 서면
내 키는 어떤 징후로 0.5센티 줄어져도
너만은 줄곧 시퍼런 나의 20대
7문반의 치수를 고수하나니
신.발 신발
나의 시퍼런 수치여.
<사랑의 땅> 중 ‘불변의 수치’ 전문
팔순이 다 되어 쓴 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과 뜨거움이 느껴졌다. 위의 예를 들 한 편의 시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상에 몇 편 안되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한편 한편 예사롭지 않은 노시인의 마지막 불꽃같은 혼신을 다한 열정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올라 잠시 멍멍해졌다. 순간 머리를 쿵 하고, 죽비를 한 대 얻어맞았다.
뒤늦게 찾아오는 문학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으로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글을 쓰는 우리로서는 박완서 선생님보다는 이숭자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우리들의 우상이 아닐까? 댓가를 바라지 않는 문학의 길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길일지도 모른다. 무상성에 굴하지 않는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인의 길일지도 모른다.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인 중 단 1%도 안 되는 소수의 문인들만이 이름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무명의 문인들로서 잊혀지는 냉정한 문학계의 현실 속에서, 열심히 쓰다가 잊혀져간다면 그 또한 수많은 무명의 선배 문인들의 길을 따라가는 영광스런 길이 아닐까? 어쭙잖은 글로 본국의 문단에 연을 대려고 기웃거리는 것보다는 과감히 이 땅에서 무명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또 한편 이숭자 선생님은 이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이 결코 자기과시나 자기만족의 유희가 아님을 보여주셨다. 아래의 시를 보자.
내 펜은 몽글어진 송곳이다.
내 책상은 쓰러져가는 다리다.
백지장은 내 앞에서 너덜너덜 여위어간다.
꽃병은 이미 무너졌다.
내 손은 낡은 넝마 장갑이다.
내 눈은 장님의 안경테다.
내 귀는 이상물질 들어간 보청기다.
내 코는 꽃가루 없이 사철 엘러지 환자다.
내 방에는 창문이 없다.
모조리 질식했다.
저 검은 손이
하루의 푸른 공단 오존 이불 한복판에
와지끈 큰 구멍 하나 무작히 뚫어놓고
몰래 내려와 내 작은 벽을 뚫고 들어왔나
내 두뇌에 녹두벌레만한 구멍 뚫었나
상처가 아물 피 찌거기도 말랐다.
매미떼가 벗어놓고 간 껍질처럼
낱말, 낱말이 수두룩히 곯아 떨어졌다.
내 시는 죽었다.
내가 죽었다.
<사랑의 땅> 중 ‘낱말이 질식했다.’ 전문
단 한 명의 독자가 읽어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수한 낱말들을 죽이며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문장과의 투쟁임을 보여주셨다.
미주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상성에 두려워하지 않는 문학, 그리고 자칫 글 쓰는 자의 자만심으로 빠지기 쉬운 자기만족의 문학을 경계하고 한자 한자 시어들을 깎아나가며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글을 쓰셨던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미주문인의 영웅이었다. 또한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미주 문학의 정체성을 인식한 시인이었다. 20년 모문학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국에 살아오는 동안 ‘나’라는 한 사람이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발로 이 땅을 밟고 스치고 지나간 많은 인종들, 그들과 함께 어울려 행복한 조화의 삶과 값진 새 문명을 함께 어깨를 나누는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여긴 한국문학과 달라야 됩니다. 여긴 바로 우리들의 현장문학이 싹터야 돼요.”
이러한 선생님과 더불어 송상옥 선생님, 고원 선생님 등 문학의 불모지에서 개척자적 자세로 미주 문학을 개간하셨던 선배들의 열정으로 90년대 한때 미주 문학은 “한국 문학의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다.”는 타이틀로 본국지에 기사가 나갈 정도로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숭자 선생님이 내리친 죽비에 밤새 얼얼해 있다가 다음 날 내가 속한 글마루 문학회의 몇 분들과 상의하여 간소하나마 이숭자 선생님 추모 문학회를 열어보는 것이 어떨까 상의하였다. 인연이 닿은 탓인지 글마루의 정해정 회장님은 평소에 고인께서 가장 아끼는 후배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정해정 회장님께서 이숭자 선생님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발표를 준비해주시겠다고 한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훔볼트의 선물>에서 주인공 시트린은 뒤늦게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위대한 스승을 추모하지만 내게는 올해 이숭자 선생님과의 뜻밖의 만남이라는 소중한 유산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숭자 선생님을 통해 작가는 잊혀져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치열하게 글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는, 작은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