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는 도대체 무엇인가?

by 박성춘 posted Feb 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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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는 무엇인가? NaCl 선악과는 말 그대로 선악을 분간할 수 있게 만드는 나무의 열매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선악과가 실제로 어떤 나무의 열매 그 자체가 그 당시에 존재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사실을 그대로 적어 놓은 보고서가 아닌 이상 선악과를 문자적으로 보다는 의미적으로 어떤 영적인 메시지가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는 선과 악의 각자 나름의 판단이 있고 그 판단으로 싸우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쉬운 예로 미국의 대통령 부시와 극단적 무슬림 테러조직의 빈라덴은 각자의 판단으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본인위주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생각으로 본인의 잘못보다는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게 보이고 판단하여 신경전 내지 싸움을 하게 된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뱀의 유혹으로 따 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판단은 하나님만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판단을 왜 하나님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만이 그런 자격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판단하더라도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격없는 인간이 선악을 판단하게 되자 몸과 마음에 암적인 세포가 생겨나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대로 인류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여기서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다. 만약 뱀의 꼬임이 없었다면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까? 그 질문의 대답 이전에 먼저 뱀도 과연 문자적으로 그당시 뱀이었을까? 선악과가 실제 과일이 아니라면 뱀도 실제 뱀이 아니리라. 아마도 동물중 뱀이 가장 징그럽게 생겼고 간교하게 혀를 낼름거리는 모양 때문에 창세기 기자는 아담과 하와의 순진한 마음에 서서히 침투한 간교한 영적 실체를 뱀으로 형상화하여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을 구원의 길로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러한 창세기 기자의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고는 산속에서 뱀을 만나면 사탄이라며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동물애호가들중 많은 사람들이 뱀을 반려동물로 함께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의 선악과와 뱀은 어떤 과일과 동물 자체가 아니라 영적 실체임을 알 수 있다. 선악과와 뱀은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어느새 슬그머니 들어온 영적 실체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그것들이 아담과 하와가 소유했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기자는 그 두 영적 개념을 과일과 뱀으로 개체화 시켜 아담과 하와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인간의 마음에는 선악과와 같은 탐스러운 유혹과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만드는 뱀이 도사리고 있다. 예수님도 그 두 영적 실체에 직면했지만 다행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인류사에 예수님과 같이 선악과와 뱀으로 부터의 시험을 죽음 직전까지 이겨낸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하며 첫째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불러 왔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는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모본이 되셨고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고, 아담의 타락이후 하나님과 단절된 인류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만드셨다. 요한복음에는 믿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고 도마복음에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도마복음이 먼저 쓰여졌다고 볼 때, 예수님은 자주 들을 귀 있는자는 들으라하시며 말씀의 깨달음을 강조하시곤 했다. 하지만 깨닫는 이는 소수이고 그 외 대다수의 민중들을 위해 믿음의 길을 제시하신 것은 아닌가. 중세의 시작점에 있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부들의 정경화 작업은 오직 믿음의 길만 정경으로 채택했고 깨달음의 문서는 폐기처분하였다. 아마도 로마제국의 통일에 있어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통일제국에 이로운 문서는 깨달음보다는 믿음이었으리라. 대부분이 문맹인 그 당시 깨달음의 문서는 대중적이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백성들을 지배하는데 방해만 되었을 것이다.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것이 오케이인 믿음의 문서만이 정경으로 채택된 이후 중세암흑과 기독교의 배타적 교리와 폭력이 파생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약 1600년 동안 지하에 묻혔던 깨달음의 문서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에서 어느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고 지금 현재 많은 논란 가운데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며칠 전 오강남 교수님이 쓰신 책, 또 다른 예수 (도마복음 풀이)를 교회 권사님이신 어머니께 압수 당했고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 책을 잃고 낙담한 나는 인터냇으로 도마복음 영문판 전문을 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글의 제목은 선악과였지만 그 의도는 도마복음식으로 선악과를 보자는 뜻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도마복음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읽고 있다. 성경에는 분명 불상이나 단군상을 파손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절대 없음을 도마복음의 시각으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