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나비가 되어 (5)

by 윤혜석 posted Jun 2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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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되어  (5)


그 이후로 그녀의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대학원의 석사과정 논문은 그녀의 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작은 낚시점을 하는 아버지에게 전화로 묻던 안부는 몇 주째 드리지 못하고 있었고 저녁 시간에 가르치던 학원의 영어강사 자리는 휴직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휴직이 될 수 없다면 그만 둘 수 밖에 없다고 까지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번역하던 소설의 원고는 이제 재촉하던 전화도 끊겼다.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캄캄한 방에서 식사는 거르기 일쑤였고 그 누구와의 만남도 거부해 왔다.  

나비가 된 엄마의 환영과 아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정신병동에 갇힌 그의 얼굴이 그녀의 정신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을 찾는 일만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를 가까이 대하게 되면, 그의 흰 손을 보게 된다면 그를 부둥켜 안고 울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어두운 환경 속에서 짓눌린 가슴으로 살아온 그의 과거에서,  등에 짊어진 무거운 등짐으로만 인식되어진 그의 부모와 형제에게서,  그 가늘고 여윈 손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거친 물결같은 세상에서 그가 벗어난 것 처럼 그녀도 이 세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의 시선조차 피했고 더구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려고 했을 때 그녀가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랬기 때문인지 더 이상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다만 그는 더 초췌해 지고 있었고 불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창 밖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비가 왔다. .  
어둑해질 무렵 거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밤이 되면서 세찬 장대비로 퍼붓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휘청거렸다.  
비에 축축히 젖은 집이 외로운 짐승의 울음으로 소리내며 울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서워 비오는 마당에 한참을 서 있었다 .  

비에 젖은 채로 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젖은 꽃잎처럼 떨어져내렸다. 더듬거리며 스탠드 불을 켰다.  방 아래로부터 푸르른 빛이 차올라왔다.  
빗소리가 창문을 긁는 소리를 내며 들려왔다.  조그만 스탠드 불빛이 빗소리와 더불어 웅얼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조여오는 두려움이 어두운 방에 그림자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점점 더 다가오는 그림자.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거세진 빗소리와 두텁게 무거워진 그림자가 둘러쌌다.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빛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깜박였다.  남은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작은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 염려하던 딸에게 전화를 걸었던 아버지는 밤늦도록 전화를 받지 않는 딸을 걱정하며 동생에게 그녀를 찾아가 볼 것을 부탁했었다.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밤을 새워 달려왔다.
가엾은 딸 수경이...
눈 앞이 흐려지면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흐려지면 다시 닦았다.  

여섯살 어린 수경이가 엄마를 잃었을 때 아버지는 수경이의 슬픔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딸의 슬픔을 몰랐던 까닭도 아니었고 딸을 사랑하지 않았어서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  혼자 남은 세상에 대한 원망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한 채 딸의 외로움을 모른 채 방관하고 말았으리라.

아버지는 엄마의 죽음 이후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 두고 낚시와 여행으로 나날을 보냈다.  출판사에 다니기 그 이전부터 소설을 쓰던 소설가였던 아버지는 그 즈음에는 간혹 낚시나 여행에 관한 칼럼을 잡지와 신문에 싣기도 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후에 그가 살던 도시에서 떨어진 바닷가 마을에 작은 낚시점을 내어 줄곧 그곳에서 지냈다.  

엄마는 죽었고 아버지는 강이나 바다를 찾아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랠 때 어린 수경은 혼자서 커갔다.   좀더 커서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는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다.  수경은 작은 아버지댁에 기거하게 되었지만 혼자의 생활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경은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그 때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졌다.  그런 수경의 생활은 누가 보더라도 대견했다.  특히 아버지에게는 시간이 가면서 애처로움이 보태졌지만 한없이 수경을 대견해 했다.  
자신의 약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수경은 오히려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하려 했고 더 꿋꿋한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던 딸이었다.

그런 수경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회환의 눈물 속에서 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