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은 없다

2018.10.27 06:11

윤근택 조회 수:7

 내비게이션(navigation)은 없다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2016.1.13.05:40. 농막에서, 가족이 사는 시내 아파트로 3년여 만에 내려와, 밤새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하행 버튼 ‘B1’을 눌렀다. 내 가족이 사는 아파트 층인 ‘10’에 엘리베이터는 경쾌한 신호음을 울리며 멈추어 서더니,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아내는 흐뭇한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에 오른 나. 시동을 걸고 전조등을 환히 밝혔다. 때마침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기상대의 예보도 있었지만, 상쾌하기만 하였다. 그럴밖에? 내가 새로 얻은 직장인 어느 아파트 경비실로 첫 출근하는 날이었으니! 사실 또 새로웠던 어느 직장에서 2년여 근무하다가 또다시 실직(失職)한 지가 12일에 불과하건만, 감회가 새로울밖에. 지난 직장에서 해고된 덕분에(?) 6개월 여 실직급여를, 그것도 당시 급여 수준으로 받을 수 있어, 굳이 직장을 구할 거면, 쉬어가며 느긋하게 직장을 구하라는 주변의 권유도 많았건만, 나는 그리 할 수는 없었다. 내 심정은, 한 때 한 쌍의 젊은 개그맨들이 어느 개그 코너에서 하던 멘트 그대로였다. 그 코너에서 촌놈 행세를 하던 그들 젊은 개그맨들은 무작정 상경하여, “너무너무 일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에요.” 하며 만나는 이들한테 일자리를 하나 달라고 보채곤 했다. 정말로, 내 심정이 그러하였다. 고맙게도, 이번엔 내 작은딸아이가 인터넷으로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 녀석은 나이 스물아홉이며 미혼이고 지방 명문대 출신이며 대학재학시절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1년여 유학까지 한 이다. 자기도 아르바이트 등 수없이 구직, 취직에 이골이 난 터라, 구인광고 사이트를 좔좔 꿰고, 나한테 그처럼 맞춤형 취업을 깔끔하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새벽이라 아직 차량의 왕래가 드물어 길 막힘이 전혀 없는 도로. 이따금씩 신호대기도 해야만 했지만, 비교적 순탄하기만 하였다. 첫 출근, 그 설렘을 나처럼 자주 겪어본 적 없는 이들은 아무리 설명하여도 모르리라. 나는 사반세기 동안 시쳇말로,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국영기업체에 근무하였고, 인사부서에 부탁하여 스스로 오지(奧地)를 원해 대략 2년 주기로 근무지를 옮겨 다녔다. 그것이 그저 역마살(驛馬煞)’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움에 대한 설렘을 그렇게 즐기곤 했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나는 기질적으로 작가.

 

격일제로 근무하는 이 곳 경비실. 근무 열흘째 되는 이 밤, 드디어 인터넷도 타인들 몰래 막 자가개통(自家開通)까지 한 터. 이리하여 그 동안 내 소식을 기다렸을 애독자들과 새롭게 길을 열었다는 사실. 사실 나는 그 첫날 집에서 이곳까지 18분여 승용차를 몰고 오던 내내 한 문장을 되뇌이고 있었다.

 

나한테는 내비게이션이 없어요. 내 승용차에는 그 흔해빠진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지 않아요.’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내비게이션이란 가시내를 곁에 태우고, 그 가시내가 낭창한 목소리로 이리 하세요. 저리 하세요.’하는 대로 따라 운전하는 데 비해, 나는 참말로 언제고 스스로 길을 찾아 운행해 왔다. 내 살아온 날 60여년이 그러했다. 음치에 대응하는 말, ‘길치인 내가 마구마구 길 헤맨 적도 많았으나, 끝내는 내가 가고자 했던 기항지(寄港地)에 닻을 내리곤 하였다는 거. 그곳이 영원히 내가 정박하는 항구가 아닌, 기항지였다는 사실도 결코 놓칠 수 없다. 참말로, 내 삶은 항법장치(航法裝置) 곧 내비게이션이 없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1874~1963)가 노래한 가지 않은 길에 딱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개척주의 시절, 미국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그 시. 아울러, 나는 무한궤도(無限軌道)’를 지닌 굴삭기 등과도 비슷한 성향을 지닌 이임에 틀림없다. 사실 나는무한궤도라는 수필작품을, 1997년에 발간한 본인의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에 실은 바 있다. 그 글 줄거리는 대충 이렇게 되어 있다.

 

대개의 차들은 정해진 궤도나 도로를 달리게 되는데, 탱크나 블도우저나 굴삭기는 이미 만들어진 궤도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궤도를 만들어 나아간다. 그러기에 그것들에 달린 특수한 바퀴를 일컬어,‘무한궤도라고 한다. 그 특수한 바퀴가 무한한 궤도를 만들어내니 놀랍지 아니한가.’

 

어쨌든, 나한테는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내비게이션은 없다. 내 승용차에는 끝끝내 내비게이션을 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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