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다는 것

2019.03.23 05:52

이진숙 조회 수:4

혼자 걷는다는 것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휴~ 다행이다.어제 일기예보에 오늘 오후부터 내일 오전까지 제법 많은 비가 내리겠다고 했다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가 살포시 나와 있다. 이런 날 무슨 비가 올까,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방에 우산을 넣고 나왔다.

 매주 수요일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수업시간에 나온다는 어느 문우님 말마따나 참으로 맛깔나고 소박하여, 마치 집에서 어머니가 직접 해 주시는 밥처럼 온기가 넘치는 밥을 푸짐하게 먹고 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데도 헤어질 때는 섭섭하여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정다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 서서 막 혼자 걷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후드득 빗방울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걸어가던 사람들이 당황한 듯 뛰어가기도 하고, 주변 상점 앞으로 가서 잠시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랑스럽게 우산을 펴서 손에 들고 당당하게 빗속을 걸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은 노래 같아 신이 났다.

 겨우내 눈 같은 눈도 없었고 또 그렇다고 비다운 비가 내린 것도 아니었다. 미세먼지만 가득 쌓인 뿌연 하늘을 보며 답답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봄을 맞아 텃밭에 완두콩을 심으려고 호미로 땅을 톡톡 두드리니 마치 모래를 만지는 듯 스르르 흘러내리며 먼지만 날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신통하게 일기예보대로 오후에 딱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 나는 복도 많지, 우산을 받고 한적한 천변을 혼자 걸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다니!

 아주 오래 전에 ‘류마티스 관절염’이란 병을 얻었다. 열심히 진료하던 의사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내린 처방은 ‘살이 찌지 않도록 먹는 것을 조심하고, 열심히 걸어야 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의 혼자 걷기가 시작되었다.

 걸을 때마다 나의 길동무가 되어 준 것은 라디오와 귀에 꽂는 이어폰이었다. 귓속을 통해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렇게 걷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었다. 외국여행을 갈 때도 이른 아침에 잠깐이라도 꼭 걸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걷다 보니 주변에 눈길을 줄 틈이 없었다. 이어폰을 빼고 보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 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혼자 걸으면서 듣는 자동차 경적소리마저 내가 그곳에 있음을 실감나게 했다. 세상의 소리는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힘이었다. 특히 천변을 혼자 걸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흐르는 물소리, 온갖 풀꽃들의 재잘거림, 머리 위를 나르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세상의 소리이고, 내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때로는 도심을 혼자 걷기도 한다. 사람들 틈에 끼어 바쁘게 걷고 있으면 나도 그들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그 시절로 돌아 간 양 즐겁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천변에서 띄엄띄엄 걷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나 혼자 천변을 다 차지하고 우산을 뱅글뱅글 돌리며 즐겁게 걸었다. 어느 새 쑥이 새끼손가락만큼 올라와 있었다. 냉이는 이제 할 일을 다 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듯 머리에 하얀 화관을 얹고 목을 기다랗게 빼고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다. 흐르는 물소리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맞춰 웅장한 관현악연주인 듯 멋진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다. 마치 온갖 부정과 부패, 억울함 등을 내가 모두 가지고 가겠다는 듯이 흘러 내리고 있다.  

 이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듯 물소리를 내 뒤통수에 묶어 놓은 채 천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늘 사람들로 붐비는 시내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 내리니 그곳에도 내 발자국을 기다리는 반가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십년 넘게 걷는 이 길, 얼마 전까지 새까만 지붕을 뒤집어 쓴 채 인삼을 키우던 인삼밭엔 어느새 초록이 짙은 대파 모종이 심어져 있다. 지난겨울까지 도라지를 품고 있던 밭은 하얀 냉이꽃 천지다. 그것들 모두에게 고개를 돌리며 일일이 눈인사를 하고 지나다 보면, 어느새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 챈 듯 멀리서 ‘멍 멍’ 우리 집 개짖는 소리가 나를 반긴다.

 

 사람살이도 결국은 혼자 걷는 것이 아닐까! 걷는 동안 많은 사람과 부대끼고 또 돌뿌리에 채어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예쁜 꽃들을 보고 좋아하면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리라 마음먹는다. 

                                        (2019.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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