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하나

2019.03.30 15:03

최정순 조회 수:3

추억 하나

          -어느 장례시장에서-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최 정 순

 

 

 

  몇 년 전 일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내 옷차림은 모자부터 코트, 치마, 가방, 신발, 심지어 립스틱까지 빨강색 일색이었다. 아마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저만치 서있는 나를 보고 빨간 우체통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런 차림으로 검정색 일색인 문상객 속에 끼어 있었으니 그 꼴이 어땠을까 몹시도 빨강색을 좋아하는 나! 이렇게 내 일생에서 빨강색 옷차림으로 아주 난감했던 추억 하나가 있다.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그 추억이 오늘 시상식장에 나타난‘상쇠’를 보는 순간 번개처럼 다시 떠올랐다.  

 

  2019323일 영호남수필문학회 전북지부 제2회 완산벌문학상 시상식 때였다. 1부는 2019년 총회, 2부는 문학강의, 3부는 시상식 순서로 진행되었다. 나는 접수를 받느라 12부는 건성으로 들었다. 3부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정돈하는 막간을 이용하여 꽹과리를 선두로 징, 장구를 두드리며 풍물패 10여 명이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신명을 불어 넣었다. 아니, 이럴 수가? 울긋불긋 치장을 하고 꽹과리를 치는 선두 주자가, 내가 몇 년 전에  문상을 갔을 때 구구한 변명을 하며 인사를 나눴던 그 여자상주가 아닌가?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염치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가 상쇠 어깨를 툭 치며 파이팅을 외쳤다. 문인들 중에 누구 하나 분위기에 젖어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없었다. 문인들은 대체로 속마음을 들어 내지 않는 줄 알지만 그래도 좀 서운했다. 나도 역시 나가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감정조절을 하며 손바닥 몇 번 치는 것으로 만족했다.  

 

  몇 년 전에 갑자기 문상을 가게 된 사연은 이렇다. 공교롭게도 수필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영호남수필문학 전북지회장(김정길)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모인 김에 문상을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전주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미리 도착한 행촌수필회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 역시 내가 달갑지 않은 차림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두 나에게 질책이 쏟아졌다.

 "모자를 벗어라. 코트를 뒤집어 입어라. 스카프로 코트를 가려라. 차라리 차속에 그냥 남아있던지. 왜 하필이면 빨강색옷을 입고 왔느냐?"

모두가 나를 몰아세웠다. 나와 행동을 같이하면 일행의 품위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까봐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그때의 내 심정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내가 뻔뻔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죄인도 아닌데 죄인이 되어 도둑고양이처럼 덩치 큰 회원 뒤에 숨어서 살금살금 문상객 속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때 나만 맏상주와 맞절을 못하고 어정쩡 귀퉁이에 서있었다. 겨우 여자상주와 자초지종을 애기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지금은 비둘기 풍물패 상쇠가 된 그녀와 가까워졌다. 풍물놀이가 끝난 뒤 누가 내 허리를 휘감기에 뒤돌아보니 바로 그 상쇠였다.  

 

  상주와 인사를 나눈 일행은 다과상에 모여 앉았다. 유난히 빨간 딸기와 방울토마토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우리도 빨강색이잖아요? 고인도 빨강색을 좋아했어요. 그러니 주눅들지 마세요.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오히려 붉은색일색인 나를 고인께서도 반기고 있으리라.' 이렇게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생각을 바꾸니 차츰차츰 오금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딸기와 방울토마토 덕에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들고 여기저기 손님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았다. 김치도 고춧가루로 감투를 쓰고있고, 육개장도 빨강고추기름이 둥둥 떠 있다. 막걸리도 마시면 붉어졌다. 반찬이며 과일들이 모두 빨강색 일색이었다. 초상마당이 검정색 일색이라면 검정 깨죽이나 검정 쌀로 밥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초상집 음식은 개운해야 한다며 김치도 더 곱게 담갔다. 빨간 팥으로 죽을 끓여서 대접했다.

 성서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냈을 때도 흠없는 어린 숫양의 빨간 피가 문설주에 뿌려진 집은 죽음이 건너뛰었다고 해서 파스카(과월절)라 하였고, 이날을 기념하기에 파스카축제라고 한다. 또 있다. 명정(銘旌)도 붉은 천에 흰색으로 글씨를 써서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다가 마지막 관 위에 씌워서 묻힌다. 동지 때도 팥죽을 끓여 집 안팎에 뿌리는 풍습도 있다. 이렇게 빨강색은 잡귀를 쫒는 의미가 다분하다. 하늘을 보라, 태양도 붉은색이다. 생명을 살리는 색이다.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뛰게 하는 빨강!

 장례식장은 죽음의 무서운 구렁텅이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낳는 붉은색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2019. 3. 30.)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7 나이 들어 대접받는 7가지 비결 두루미 2019.04.01 10
566 우상 그리고 신격화 한성덕 2019.04.01 4
565 의성 허준 두루미 2019.03.31 5
564 그 나이면 다들 그래 박용덕 2019.03.31 4
563 청바지 김재원 2019.03.31 4
562 들깨 타작 신효선 2019.03.30 36
» 추억 하나 최정순 2019.03.30 3
560 일곱 번째 손주 소식 정석곤 2019.03.30 3
559 도토리묵 정남숙 2019.03.30 8
558 인연 최상섭 2019.03.29 4
557 이런 버스 기사님만 있다면 변명옥 2019.03.29 3
556 온고을 전주에서 사는 행복 김학 2019.03.29 3
555 제주도에서 한 달 살아보기(2) 최은우 2019.03.28 9
554 진달래꽃 김세명 2019.03.28 5
553 남편이 '충성!' 하면 김창임 2019.03.28 23
552 나무고아원과 식목일 구연식 2019.03.28 3
551 조춘 김효순 2019.03.27 6
550 수필의 맛 김수봉 2019.03.26 5
549 이 책을 좀더 일찍 읽었더라면 임두환 2019.03.26 6
548 살아있음은 곧 은총 김창임 2019.03.25 6